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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우화의 강 1/정신과 병동/밤노래 4/바람의 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2. 2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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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우화의 강 1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산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그 나라 하늘빛』.문학과지성사. 1991:『마종기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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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과 병동


   마종기

 

 
   비 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겨울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 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풍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
   지겹지 않고, ―
   가운 입은 피에로는
   비 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두번째 겨울』.부민문화사. 1965:『마종기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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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노래 4


마종기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멀리 있으면 당신은 희고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인다
산에서 더 높은 산으로 오르는 몇 개의 구름,
밤에는 단순한 물기가 되어 베개를 적시는 구름,
떠돌던 것은 모두 주눅이 들어 비가 되어 내리고
내가 살던 먼 갈대밭에서 비를 맞는 당신,
한밤의 어두움도 내 어리석음 가려주지 않는다.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 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 :『마종기 시전집』.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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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마종기 시전집』. 199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