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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밝고 배려심 많던 그 아이, 왜 끔찍한 선택을 했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3. 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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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리포트]밝고 배려심 많던 그 아이, 왜 끔찍한 선택을 했나

[자살자 그들은]27세 대학생 심리적 부검해보니 동아일보 | 입력 2014.03.14 03:07 | 수정 2014.03.14 08:16

 

[동아일보]

《 자살 유가족에겐 가슴 속 응어리로 맺힌 의문이 있다. '(망자가) 왜 그랬을까….' 자살을 쉬쉬하는 분위기 탓에 우리는 자살자의 고뇌를 정면으로 응시한 적이 거의 없다. '그들만의 비극'으로 방치되는 사이 자살은 계속 늘어 왔다.

동아일보 탐사보도팀은 최근 2년 간 일어난 자살 60건에 대해 심리적 부검을 했다. 망자들이 삶의 의지를 잃어가는 과정을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절망의 깊이를 미리 알아봤다면 살릴 수 있었던 생명이 적지 않았다. 2012년 4월 생을 마감한 대학생 이모 씨(27)의 비극을 독자들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취재팀은 이 씨 어머니인 최모 씨(53)의 집을 2차례 찾아 유족들과 12시간 동안 면담했다. 이 씨의 친구와 군대 동기, 대학 후배 등도 따로 만났다. '애교쟁이 아들'이었던 그가 왜 모진 선택을 했는지 설명해줄 잊히거나 묻혔던 순간들을 복원하는 여정이었다. 》

● 서울대생 누나

"엄마, 저 분대장 됐어요."

2009년 5월 상병으로 군복무 중이던 이 씨가 들뜬 목소리로 집에 전화를 걸어왔다. 이 씨는 아직 상병인데 남들보다 일찍 분대장이 됐다며 기뻐했다. 이 씨의 군 동기는 "OO가 후임들을 자상하게 대하고 활달해 인기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곧 사달이 났다. 중대장이 자살 우려가 있다고 당부한 이등병이 한 명 있었다. 이 씨는 식사 때마다 그 이등병을 데리고 다니며 신경을 썼다. 하지만 후임병은 이 씨가 분대장이 된 지 두 달 만에 끝내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 씨의 군 동기들은 "사건 직후 OO가 침울해하며 급격히 말수가 줄고 식사를 자주 걸러 삐쩍 말라갔다"고 했다. 소속 부대 중대장은 어머니 최 씨한테 "아들에게 이상한 점이 있으면 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분대장도 이 씨의 동기가 대신 맡도록 했다.

자살을 목격한 충격 못지않게 이 씨를 힘들게 한 건 분대장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책감이었다. 이 씨의 군 동기는 "OO가 '분대장 자격이 없나보다'라는 탄식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현재의 실망감이 치유되지 못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건드릴 때 자살의 전주(前奏)가 시작될 수 있다.

이 씨가 군복무 할 당시 그의 누나는 서울대에 다녔다. 누나는 다재다능해 어려서부터 인정받았다. 누나가 첼로 레슨을 받으러 가면 그는 엄마와 함께 차에서 기다리곤 했다. 집에서 레슨이 있을 땐 방해가 안 되게 발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가족 기도를 할 때도 누나를 격려하는 내용이 70%라면 그에 대한 건 30%에 그쳤다.

엄마 최 씨는 "공부 문제로 아들을 누나랑 비교한 적은 없다"고 했다. 대신 아들에게 "나중에 가장이 될 테니 책임감이 강해야 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최 씨는 "아들에게서 '힘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최전방에서 복무하면서도 전화통화를 할 때면 늘 "괜찮다"고 했다.

이 씨의 고교 은사와 친구들은 이 씨에 대해 "밝고 배려심이 많은 아이"라고 했다. 이 씨는 누나와도 사이가 좋았다. 최 씨는 아들이 착한 아이로 인정받으면서 누나로 인한 좌절감을 만회하려 했을 수 있다는 점을 짐작하지 못했다.

● '착한 아들' 증후군

이듬해 2월 제대한 이 씨는 최 씨를 '엄마'가 아닌 '어머니'로 부르기 시작했다. 애교가 사라지고 과묵해진 아들을 최 씨는 의젓해졌다고 여겼다. 방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 씨는 뜻밖의 선언을 했다.

"다시 수능을 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게요."

석 달 뒤 첫 수능 모의고사에서 상위 10%에 들겠다는 목표도 밝혔다. 최 씨는 "그 때 모처럼 아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고 했다. 당시 이 씨는 3수(修) 끝에 들어간 지방대 2학년에 휴학 중이었다.

모의고사 결과가 나온 날, 이 씨는 공부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목표에 못 미쳤다는 게 이유였다. 가족들은 "계속 공부해보라"고 했지만 이 씨는 입시 학원을 그만뒀다.

이 씨는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엄마가 "복학은 언제쯤 할 거냐"고 물으면 "간섭 말라"고 쏘아붙였다. 부모는 영국 어학연수를 권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재충전 하면 예전의 명랑함을 되찾을 것 같았다. 이 씨는 유학 권유마저 계속 거부하더니 엄마가 "그래 가지 마"라고 하자 갑자기 "가겠다"고 말을 바꿨다. 미국 명문대 유학준비를 하던 누나와 달리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반항심이 들면서도 부모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동시에 갖고 있는 듯 했다.

영국 생활 1년 쯤 되던 2011년 7월, 이 씨는 엄마에게 "일을 시작했으니 생활비를 부치지 마라"고 했다. 영어 인터뷰까지 통과해 마트에서 일하게 됐다고 뿌듯해했다. 하지만 열흘 뒤 다시 연락이 왔다. 비자 문제가 생겨 해결될 때까지 마트에서 잠시 쉬라고 했다는 것이다. 최 씨는 "곧 다시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아들은 '되는 일이 없다'며 바로 귀국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얼마 뒤 "복학 등록금을 벌겠다"며 동네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일 오전 7시 꼬박꼬박 출근했다. 하지만 일 시작 한 달 만에 이 씨는 "부당한 대우를 견딜 수 없다"며 그만뒀다.

"공부 잘 하고 똑똑한 놈들은 잘 되고 나처럼 못난 놈은 망하는 세상이에요."

최 씨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 씨가 의욕적으로 시작한 일을 금방 포기하는 건 애초에 목표했던 자신의 이미지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면 이 목표를 이룰 다른 일을 찾아 나서기 때문인 것 같았다.


● 전날 밤의 평온한 얼굴


그 후 이 씨는 방에서 게임에 몰두했다. 하루는 외출한 엄마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가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손님 오니까 거실 좀 정리해줘.'(엄마)

'나한테 강요하지 마. 더 이상 안 참아.'(아들)

'집에 가면 너 혼날 줄 알아.'(엄마)

그날 최 씨가 집에 왔을 때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친구 집에 간 줄 알았던 아들이 실은 자기 방 침대 밑에 20시간 넘게 숨어있었다는 걸 최 씨는 나중에 알았다. 침대와 창가 벽 사이 50cm쯤 되는 공간에 누워 180cm가 넘는 거구를 감춘 채 온종일 노트북 게임을 했던 것이다.

이 씨는 엄마에게 대뜸 '당신은 나의 독입니다'라는 문자를 보낸 적도 있다. 최 씨가 이유를 물으면 냉소적인 표정을 지을 뿐 답이 없었다. 이 씨의 친구는 "OO가 교회에서 노래 부를 때 평소와 달리 음정보다 훨씬 낮게 부르고 기도할 때도 혼자 끙끙대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겨우 말을 이었다"고 말했다. 자살 결심이 임박했을 때 인지력이 떨어져 나타나는 퇴행 증상 중 하나였다.

최 씨는 아들과 함께 상담기관을 찾았다. 이 씨는 상담사에게 "엄마한테 상처를 많이 받았다. '공부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했을 때도 서운했다"고 했다. 기대치를 못 맞추자 부모가 자신을 포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씨는 3차례 상담하며 조금씩 나아졌다. 상담사는 "우울 증세가 있어 지속적인 상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며칠 뒤 이 씨는 복학을 이유로 상담을 중단했다. 이 씨의 아버지는 "저 나이 땐 그럴 수 있어. 곧 괜찮아질 거야"라며 상담 중단을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 때가 이 씨를 살릴 마지막 기회였다.

이 씨는 대학에 복학하면서 활력을 되찾는 듯 했다. 동급생보다 5, 6세 많았던 이 씨는 교수 권유로 과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4월 중간고사를 앞두고 이 씨는 "시험 망하면 어쩌지"하고 자주 불안해했다. 5년이나 쉬었던 전공 공부(화학)를 따라잡지 못하는 듯 했다.

최 씨가 아침에 아들을 깨우려 방에 가면 과자봉지가 수북하고 책과 유인물이 어질러져 있었다. 최 씨는 "시험 전날 밤이 되서야 아들이 편안해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시험 당일 아침, 아들 방문을 열었을 때의 충격을 최 씨는 말로 옮기지 못했다. 전날 평온한 표정은 결심을 내렸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이 씨의 대학 후배는 "'맏형'으로서 빼어난 성적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중압감을 못 이긴 것 같다"고 말했다.

● 자살은 한국적 비극

이 씨는 자기가 원하는 목표가 아닌, 남들이 인정할 목표를 세웠다. 그러다 미치지 못하면 쉽게 좌절하는 패턴을 반복하다 자살에 이르렀다. 듬직한 아들, 유능한 선배라는 나름의 자화상을 세워놓고 거기에 맞추려 안간힘을 썼다. 누나와 오랫동안 비교되면서 각인된 열등감이 인정 욕구를 자극한 것으로 보였다. 가족의 관심 한가운데에서 홀로 외로운 투쟁을 해온 것이다.

자살을 하려는 사람은 시야가 좁아진다. 어두운 터널 안에서 끄트머리의 밝은 점 하나만 바라보는 '터널 효과'가 나타난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화끈한 해결 아니면 자살. 이 두 가지를 놓고 저울질하다 당장의 고통을 멈추기 위해 후자를 택한다.

서종한 아주대 심리학과 연구원은 "이 씨는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우울해지고 적대적이 됐다. 가족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피해의식과 내가 짐이 된다는 생각까지 겹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경쟁을 강요하는 우리나라에선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었다.

담담히 면담에 응하던 최 씨는 말미로 가면서 눈물이 많아졌다.

"아들의 애교도 인정받고 싶다는 표현이었을까요. 그 마음을 진작 알았더라면…."

자살은 일이 벌어진 뒤에야 비로소 중요한 단서들을 꺼내놓는 듯 했다.

:: 심리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 ::

자살자의 생애를 되짚어가며 그가 겪은 고통의 실체를 찾는 작업이다. 유가족 등 지인의 진술, 고인이 남긴 기록, 생전 심리상담 보고서 등을 분석한다. 심리적 부검을 통해 대응책을 마련하면 자살 예방이 가능하다.

신광영 neo@donga.com·손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