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산 ♠ 시

안 가본 산 / 이성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4. 9. 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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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본 산

 

이성부

  

 

내 책장에 꽃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꽃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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