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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 샘터/소라/추억/의자/하루만의 위안/오산(烏山) 인터체인지/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목련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3. 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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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조병화  

 

 

빨간 태양을 가슴에 안고

사나이들의 잠이 길어진 아침에

샘터로 나오는 여인네들은 젖이 불었다.

 

새파란 해협이

항시 귀에 젖는데  

마을 여인네들은 물이 그리워

이른 아침이 되면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태양을 안고

잎새들이 목욕한

물터로 나온다.

 

샘은 사랑하던 시절의 어머니의 고향

일그러진 항아리를 들고

마을 아가씨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따르면

나의 가슴에도 빨간 해가 솟는다.

 

물터에는 말이 없다.

물터에 모인 여인네의 피부엔

맑은 비늘이 돋힌다.

 

나도 어머니의 고향이 그리워

희어서 외로은 손을

샘 속에 담구어 본다.

 

해협에 빨간 태양이 뜨면

잠이 길어진 사나이들을 두고

마을 여인네들은 샘터로 나온다.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해가 돋는다.

꿈이 젖는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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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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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조병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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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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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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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烏山) 인터체인지
고향에로 가는 길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식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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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을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말면서도.

 

 

 

30 시집추억(자유문학사, 1987 초판)

안도현 외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이가출판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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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화

 

조병화

 

철학개론이랑 말라

면사포를 벗어 버린 목련이란다

 

지나간 남풍이 서러워

익쟎은 추억같이 피었어라

 

베아트리체보다 곱던 날의 을남이는

흰 블라우스만 입으면 목련화이었어라

 

황홀한 화관(花冠)

4월은 오잖은 기다림만 주어 놓고

아름다운 것은 지네 지네

호올로

 

 

 

김희보 편저韓國의 명시증보판(종로서적, 개정판 198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