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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시 모음 - 권정우/함민복/이재무/임영조/김신예/조성국/신현정/허형만/김정임/김춘/김창완...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3. 2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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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시 모음




운주사 와불   

 

권정우 

  

 

천 개의 부처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뒤에도  

나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지만  

 

당신 곁에  

또다시 천년을 누워 있어도  

손 한번 잡아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천 개의 석탑이  

다시 바위로 들어가 버린 뒤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겠지만  

 

내가 당신 곁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 모르는 당신은   

다시 천 년이 지나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테지만

 


 

―월간『유심(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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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함민복

 

 

비 내려

와불의 눈에 빗물 고인다

내 아픔이 아닌

세상의 아픔에 젖을 수 있어

내리는 비도

눈물이구나

그렇게, 다 그렇게 되어

세상에

눈물의 강 흐르면

그 위를

마음 배들

구름처럼 평화롭게

떠갈 수 있다는 설법인가

북두칠성 낮게 끌어내린 뜻도 알 듯한

 

 


―월간『문학사상』(200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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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이재무

 

 

다 늦은 봄날, 눈은 내려서
길도 마음도 젖은 흙이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부질없고 아득해져서
생각의 배 맞는 지기 몇 더불어
운주사 가니
큰 배 한 척 산중에 정박중인데
크고 작은 선실마다에
성도 이름도 없이 촌부들 저희끼리
누워 혹은 기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어디서 메주 뜨는 내음 솔솔 풍기고
점심 거른 배 하도나 출출하여
통성명 없이 情人된 절간 속 장삼이사들
데불고 가서 추어탕 한 그릇
탁주 한 발로 요기와 한기 풀며
거하게 취해 천 년을 살다 오는 길
마음도 길도 미풍에 날려
볼에 와 닿는,
춥지 않은 춘설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달빛 받은 창호지같이
환하고 까닭없이 그저 고맙고

 

 

 

―시집『푸른 고집』(천년의시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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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주사 와불


  임영조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키 크고 마음 착한 미남 석공과 키 작지만 요염한 공주가 한가윗날 밤 우연히 서로 눈이 맞아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유부남 유부녀라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사랑이 날로 깊어질수록 한편 괴로워했다 허나 그들은 마침내 야반도주를 모의하고 배 한 척을 마련하려 백방으로 뛰었다 하늘도 그 애틋한 순애에 감복하여 이 세상 아닌 딴 세상에 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구름배 한 척을 내려주었다
  그들은 사랑에 부푼 돛을 올리고 세상 밖으로 밤낮없이 노를 저었다 그러다 비바람 몰아치던 칠석날 저녁 그들의 배는 북두칠성 모서리에 부딪쳐 화순군 도암 들녘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들의 육신과 배의 잔해는 땅에 떨어지면서 크고 작은 바위로 굳어 도처에 널려졌다 하늘은 덫으로 놓아둔 북두칠성에 좌초된 것을 못내 가엾게 여겨 칠석날 저녁이면 일곱 별을 내려 곡하게 하고 비를 뿌렸다 그리고 천상의 석공들을 내려 보내 백일 동안 밤도와 그들의 석상을 세우게 하고 배의 잔해로 천불천탑을 완성하라 명했다
  드디어 완성된 석상을 막 세우려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새벽닭이 울었다 그 소리에 놀란 석공들은 그만 서둘러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운주사 영구산 마루 양지녘에는 그 석공과 공주가 금실 좋은 와불로 누워 세상 밖으로 갈 구름배 한 척 기다리고 있다 곧 나란히 일어날 듯 하체 약간 비스듬히 쳐든 채

  치정도 지극하면 성불하는가?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5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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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와불

       
김신예

 

 

나는 집 없는 피안의 와불
산중에 바람소리 벗삼아
득도한 몸이라
여기 누워 천년을 산다 한들
무슨 근심 있으랴
새처럼 훨훨 삼라만상 떠돌다
등 붙이면 거기가 하룻밤 거처
이승의 탐할 것 무엇인가
해탈에 이른 자는
한 줄기 햇살조차 밟지 않는 법
약하고 어리석기가
사람보다 더한 것 무엇이던가
저기 산 아래 석불을 보라
팔 하나 잘라 개울에 던져 넣고
머리도 떼어 길 위에 버려 두니
왜냐고 누가 묻거든
무슨 말을 해주랴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뿐

 

 

 


―시집『히잡 쓴 여자』(시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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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와불


조성국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걷고 있는 거다 저문 하늘에

빛나는 북극성 좌표 삼아

천지간을 사분사분 밟으며 오르고 있다

등명(燈明)의 눈빛 치켜뜬 연인과

나란히 맞댄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도록

이 세상 짊어지고

저 광활한 우주로 내딛는 중이다

 

무릇 당신도 등짐 속의 한 짐!

 

 

 

 

―시집『슬그머니』(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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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불臥佛

 

신현정

 

 

나 운주사에 가서 와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 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와불이 누으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 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고 무심코 내찼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년 내놓으시라


천년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시집『바보 사막』(램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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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에서

 

허형만

 

 

운주사에 오면


눕고 싶다


저 와불처럼 나도 누워서


한쪽 팔 턱에 괴고


세상사 지그시, 두 눈 깔고


그만큼만 보거나


아예 몸도 생각도


다 비운 채


허청허청 시린 별로


흐르거나.

 

 

 


―시집『영혼의 눈』(문학과사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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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주사 칠성바위

 

  김정임

 

   

  산골짜기 깊숙이 북두칠성을 더듬어 갔다

 

  천체의 궤도를 따라 만들어진 동그라미는 호루스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별의 형상으로 빚어진 거대한 돌덩이를 높은 산으로 옮긴 일은 신의 계산법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빗줄기 뿐, 너무 고요해 낯선 은하계에 혼자 떨어진 것 같다

 

  먹구름 사이 작은 새가 죽을힘 다해 퍼덕이고 별의 자장은 세상 밖으로 빠르게 나를 밀어냈다 우리는 어느 별을 통과하는 중일까

 

  바람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르는 동안 꾹 다문 입술로 지웠을 옛 사람의 기도, 목이 메이는 수많은 기도를 새겨놓고 떠난 자리는 수백 년 동안 쓸쓸한 미래처럼 비어 있다

 

  남쪽 골짜기에 천근의 고독을 완성하고 흔적 없이 사라진 사람들, 두려움에 쫓기다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없는 사람의 이름을 낮게 불러보았다 너무 캄캄해서 사라진 길들, 살다 벗어던진 무거운 별자리가 신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계간『애지』(2011.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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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김춘

 

 

코가 없는 미륵

눈이 없는 미륵

눈 코 입이 없는 미륵

머리가 없는 미륵

머리만 있는 미륵

생각이 너무 깊다.

 

티끌만한 생각을

탑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는다.

 

 

 

시집 『불량한 시각』(리토피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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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돌부처님께 말 걸기

 

김창완

 

 

어느 별에서 망명 온 난민인지요

온몸 가득 마마 자국 더께 진 몰골에

집도 절도 없이 노숙자로 사시는

영구산(靈龜山) 운주사(雲住寺) 돌부처님들

 

왜 하필이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이 막돼먹은 세상에 오셨는지요

아낙네가 코 떼어 속곳 속에 감춰도

없어도 없지 않고 있어도 있지 않으니

숨 쉬지 않고도 영겁으로 가시며

 

아등바등 사는 이들 깨진 꿈 주워

개떡탑 거지탑 요강탑 쌓아 놓고

어느 새 내 맘속에 기척 없이 들어와

탐욕 덩어리 모아 돌탑 천 기 쌓더니 

 

지쳐 널브러진 우리 삶의 너럭바위에

마마 자국처럼 천문도 쪼아 놓고

그 위에 누워 밤낮으로 하늘만 보면서

왜 혼자 빙그레 웃는지요

혹시 고향 별이라도 찾았는지요

아니면 여기가 극락인 걸 깨달았는지요

 

 

 

월간유심(2015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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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와불

 

강우식  

 

 

부처님도 남녀가 같이 누우니

아름다웠다.

온돌방 같은

돌판 위의 운주사 와불.

 

사랑이었다.

캄캄 눈먼 사랑이었다.

사랑도 눈먼 사랑이 좋았다.

부처님도 중생도 같았다.

 

나는 천리 먼 길을

이 와불 한 쌍을 보기 위해

그녀와 왔다.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남녀가 누워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일심동체면 되는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부처님도 남녀인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은 비움으로써 환해지는 것이 아니라

있음으로써 없음을 채우는

물상임을 보기 위해 예까지 왔다.

 

사랑은 둘이어야 됨을

부처님은 묵언하고

행실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죽어서도 저 와불처럼

천만년 남아 있으리.

내 마음속 소망을 그녀에게

말없이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녀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격월간유심(2010.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