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비 시 모음 - 김정란/장만영/정지용/김억/문인수/원구식/김충규/황인숙/이진명/손순미/나희덕...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5. 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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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어느 하늘을 돌아왔을까

내 쓸쓸함의 새 집 짓는 소리

살과 살 사이에서

하나도 아프지 않게

 

그 집 창가에 오래도록

머리 기대고 울지 않는, 우는 여자 하나

 

나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한

 

…… 머무는 새……

 

젖는 날개

 

언니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용연향.나남출판. 2001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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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아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다.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자가본. 193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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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 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산새 걸음걸이.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비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문장(文章)23. 1941. 1 :정지용 전집. 민음사. 1988{개정판}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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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

 

 

포구십리(浦口十里)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 한나절을

모래알만 올려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漁泳島)라 갈매기 떼도

지차귀가 촉촉히 젖어

너훌너훌 날아를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리

배를 타면 어데를 가노

남포(南浦) 사공 이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안서시집(岸曙詩集).한성도서. 1929)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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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수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

  젖은 것들의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몰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 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

,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

 

 

 

(.민음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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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식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 라고 부르는 이 물 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어떤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불 속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만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기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 마디의 말.

모든 사물을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계간시와 반시(201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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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규 

 

 

비가 내린다

하늘의 한 끝에서

함께 출발한 빗방울들은

동시에 땅으로 닿지 않는다 그저

제 보폭으로 걸어 내려올 뿐이다 일찍

도착한 빗방울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쉰다

다 내려와 함께 뭉쳐 냇물을 이룰 때까지 냇물을

이룬 후 강을 이루고 강이 되어 멈춰 있다 큰 뜻 품은

놈이 바다로 향할 때 뒤에서 물살로 세계의 등을 떠민다

 

   

 

  시집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연인M&B,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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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은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시집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 2010, 초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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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

 

 

그녀는 엷은 돌빛의 옷을 입고 왔다

기다란 치마 흐르며 왔다

멀리 고향의 산간 지방에서 왔다

산나리처럼 고개 꺾으며 오래 걸어서 왔다

제비똥 떨어진 그루터기에서 신발을 고쳐 신으며 왔다

일요일, 점심때도 훨씬 지나 도착한 그녀는

내 집 마당 대추나무 아래 조그맣게 서 있었다

눈 밑 그늘진 곳이 더 파랬다

오는 대로 나를 불러 깨우지 않고 참!

언제까지 서 있으려고 바로 깨우지 않고 참!

   

 

 

시집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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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검객

 

손순미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저 거리에 저 건물에 활보한다

없이 사는 것도 서러운데 가난한 자의 지붕에

불행한 자의 가슴에 더욱 세차게

무수한 칼날을 꽂는 것이다

바람의 도포를 입은 비의 검객이 기승을 부린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가로등을 쓰러뜨리고

거친 호흡의 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

모두가 그 비를 피해 문단속을 하거나

소주를 마시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불길한 행복을 조립하거나

에라 모르겠다 지짐이라도 부쳐먹자

고양이와 개들도 후미진 구석에서 가끔 밖을 내다볼 뿐이다

그래도 저 비를 뚫고 어디론가 바삐 가는 사람들은

비의 공포보다 두려운 삶의 협박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과다하게 행복을 부풀리며 그들은 빗속을 뚫고 간다

   

비가 그쳤다

비의 칼날이 비의 검객이 쓰러진 자리에 눈물이 흥건하다

실체도 없이 우리를 위협하던 그것이

그저 눈물에 지나지 않는 그것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콸콸 울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이다

밤새도록 하수구에서 비의 울음을 들었다

  

 

 

계간내일을 여는 작가(2008,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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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그림자가 있다

 

나희덕

   

 

소나기 한차례 지나가고

 

 과일 파는 할머니 비를 맞은 채 앉아 있던 자리 

 

사과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그림자  

 

아직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피어라, 석유(현대문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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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름이라면

그 마음

누군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시집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작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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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호

 

 

  장맛비 억수같이 쏟아지고 천둥벼락 치는 밤, 숙직실로 개구리가 한 마리 찾아왔다. 비에 젖은 손님, 입이 큰 손님, 개구리는 방으로 불쑥 뛰어들어와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슬금슬금 기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그 의젓한 좌선의 자세, 개구리는 면벽으로 나는 뜬눈으로, 밤새도록 빗소리를 듣던 그 여름 허름한 숙직실.
 

  진흙길 밟을까 연등불 앞에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었다는 석가모니 전생 이야기

  비 오니 생각난다

 

  양재천 뚝방길 한 웅덩이, 흙탕물에 들어앉아 맹꽁이부처님들이 맹꽁 맹꽁,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울고 있다. 내가다가가자 울음을 뚝 그친다. 그래, 나는 살생업을 떡 쌓듯이 해온 중생이다.

 

 


―시집『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난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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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비

 

  박이화

   

 

  호박잎처럼 크고 넓은 기다림 위로 투탁다닥 빗방울 건너 뛰어오듯 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볕 아래 시든 잎처럼 그 아래 지친 그늘처럼 맥없이 손목 떨구고 늘어졌던 내 그리움의 촉수들이 마침내 하나 둘 앞 다투어 눈떠 사방 꽃무늬 벽지처럼 내 마음 안팎을 온통 분간 없이 휘감아 뻗고, 예고 없이 들이친 소낙비의 행렬에 또 한바탕 젖는 잎, 잎들 전선이 젖고 그 선을 타고 오는 그의 목소리 열대어처럼 미끈한 물비늘로 젖어와 어느새 내 몸은 출렁출렁 심해로 열리고

 

 

 

시집그리운 연어(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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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흔

 

 

몇 날 며칠을 비는 밖에 서 있었고

나는 거실에 앉아 있습니다.

내가 커피를 마시면 비는 향기라도 맡을 요량인지

흠흠 창문으로 코를 들이댑니다.

비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흐릅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벽을 헐어내고 유리창을 달았습니다만

온몸을 으깨어 주룩주룩 흘러내릴 뿐

나는 그것이 그가 침묵하는 한 방법이지

그의 눈물이라거나 감정일 거라는

지극히 감상적인 표현을 삼가겠습니다.

어쩌면, 비와 나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협곡이 흐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테면, 수학 시험지 위에서 빗발치던

사선의 붉은 색연필이든가

오래전 헤어진 빗속의 여자 같은 추억 말입니다.

어떤 세월을 들이밀어도 비는 목격자인 거지요.

비는 은유를 모르면 비유의 천재이지요.

내가 뭘 채우려 애쓴다면

비는 비우라 말할 겁니다.

어느 날은 후둑후둑 느닷없이 뛰어온 비가

? 하는 사이에 온몸을 핥고 지나갔지요.

나는 따뜻한 샤워를 하며 그의 침을 닦아내야 했는데

비의 서늘한 혓바닥은 잊을 수 없어요.

많은 날이 필요치 않았지요.

그와 나 사이에서

사이가 떨어져 나가기까지는,

많은 세월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벗기기까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젖기까지는,

 

 

 

시집꽃의 배후(바보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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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잠시 그친 뒤

 

허형만 

 

 

한나절 퍼붓던 비

잠시 그치자

잠자리 무리지어

된장잠자리

노랑잠자리

날개띠잠자리 무리지어

날 수만 있다면

일곱 번이든 여덟 번이든

아픔의 껍질을 벗고

그리움의 속내도 벗고

훠이훠이 청산이

좋아라 잠자리 무리지어

한나절 퍼붓던 비

잠시 그친 뒤.

 

 

 

-시집지 잠시 그친 뒤(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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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새벽 산에서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을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希望)의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8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문학사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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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image

 

장만영 

 

 

병든 하늘이 찬 비를 뿌려……

장미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저 사라졌다. 

 

나의 '소년' 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를 지닌 채로. 

 

이 오늘 밤은

창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孩)를 넣은 검은 관에

못을 박는 쇠망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마음아, 너는 상복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렴.

   

 

 

조광25(1940. 2)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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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비

 

이장욱 

 

 

19세기의 비가 내리면

목요일에 전화할게.

목요일,

유일한 목요일에는 전화할게.

오늘은 순교자들이 싫어져

자꾸 고개를 저었네.

어제부터는 모든 게 비대칭이야.

골목 모퉁이를 도면 또 모든 게 새로워지는,

그런 마법을 아는,

중세의 여자를 만나고 싶네.

사랑과 햇빛을 위해서라면 부디

안락사를 허용해 줘요,

밤거리를 걷다가 문득

영원한 음악 따위가 흐르지 않도록.

나는 미친 듯이 변신 중이고

나는 사라진 빗방울을 찾아 헤매네.

동그라미를 사랑해서

벌써 동그라미가 되어 버린

무정한 여자에게는 전화를.

나는 변신을 사랑하는 마법사,

모퉁이를 돌면 마법처럼

목요일은 나타나겠지.

순교자들이 싫어,

아홉시 뉴스의 순교자들이 싫어,

나는 빗속에서 전화를 하겠지.

달콤한 목요일,

유일한 목요일에는 또

19세기의 비가 내리면 

 

 

 

계간문학과 사회(2005, 여름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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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비

 

안현미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 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시집『이밸의 재구성』(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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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가는 소리

 

  유안진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 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 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을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시집다보탑을 줍다(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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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 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 대는 '' 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ㅡ시집『뜻밖에(애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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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를 맞는 저녁

 

  이승희

 

   

  당신의 살냄새 같은 앵두꽃을 데려가는 바람의 뒤에 서서 나는 비가 오길 기다린다. 한 때 그것은 내 몸을 살다간 구름의 입자들. 볼의 이마를 닮은 짐승처럼 바람이 불어 간 방향으로 떠나간 것들. 빗방울이 맨 살에 떨어진다. 스미듯 집의 불빛이 꺼졌다. 앵두꽃이 진 자리마다 물고기들이 꼬리를 감추며 나무 속으로 사라졌다. 허기가 들끓는 지상에서 상처난 짐승들이 제 눈을 파내려는 듯 자주 울었고, 핏물이 배어나오는 그리움으로 버텼다는 기별. 다시 앵두꽃은 피겠지. 바람이 솜털을 부드럽게 누이며 말했다. 몸 속에 새겨 넣은 지도 한 장이 낡아가는 저녁 당신은 피 묻은 바닥을 닦아내며 물처럼 그렁거렸지. 항상 구석의 풍경이었던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지며 구석을 지워낼 때 바람의 지워진 문장을 읽어주던 당신. 그 문장 속에서 꽃들의 한 생이 다시 시작되고 내 몸이 기억하는 빗방울의 무늬 속으로

걸어가는 저녁이었다.

 

 

 

ㅡ계간『시와 정신』(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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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는 날

 

임석재  

 

 

조록조록 조록조록 비가 내리네.

나가 놀까 말까 하늘만 보네.

 

쪼록쪼록 쪼록쪼록 비가 막 오네.

창수네 집 갈래도 갈 수가 없네. 

 

주룩주룩 주룩주룩 비가 더 오네.

찾아오는 친구가 하나도 없네. 

 

쭈룩쭈룩 쭈룩쭈룩 비가 오는데

누나 옆에 앉아서 공부나 하자. 

 

 

 

[애송 동시 -현대시 100년 연속 기획 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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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오후의 산보

 

권순진 

 

 

단추 달린 겉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우린 조금 온순해지려나

패인 주름 경계 헐거워지고

틈새엔 물방울 기름 반짝이려나 

 

빵집 앞 지나며 잔바람의 등에 업혀온

밀 향기는 전보다 더 구수하고

아스팔트 틈바구니 비집고나온 키 작은 민들레 역시

조약돌의 윤기처럼 즐거운 수작이다 

 

안경가게에는 수천 개 독자적 창들의

차별 없는 정반사로 눈부시며

올려다본 유백색 하늘은 천국에서 드리운 커튼인 듯

착시로 하롱댄다 

 

성당의 마리아상은 그냥 지나친다 해도

유치원 아이들의 노랑 행렬 풀피리 같은 재잘거림은

누구에겐들 기쁜 언약 아니랴

어제 우울했던 세간의 뉴스에 짓눌려

힘겹게 하루를 통과하였지만

오늘 덜 사나워진 짐승으로 다시 길을 걸어간다 

 

비 그치고 햇빛 길게 늘어선 거리에선

마르고 가난한 마음일지라도 웃자, 웃자

꽃잎 무너진 바오밥나무 아래

사자의 하품처럼 웃자, 웃자 

 

 

 

ㅡ시집『낙법』(문학공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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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최승자 

 

 

하늘에서 푸른 물의 상처가 내린다.

떠도는 스물 넷의 이마 위에,

하나씩 버리며 벗어 버리며

내가 마지막으로 눕는 꿈 위에

쏟아지는 비의 푸른 채찍질. 

 

꽃잎에서 슬픔의 수액이 돋는다.

부끄럽게 비어 버린 알몸에

죽은 꿈의 문신이 돋아난다.

시간이 황량하게 고인다.

   

누가 열렬한 슬픔의 눈을 뜨고

꽃의 중심에서 울고 있나

하나씩 꿈을 떠나보내며

누가 빈 몸으로 울고 있나 

 

허리에 감기는 비의 푸른 채찍

. . 스물. . 

 

 

 

ㅡ시집 時代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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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비

 

송경동 

 

 

양철지붕 두드리며

밤새 내리는 비 

 

나도 누군가의 영혼을 두드리는

겨울 찬비가 될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세상의 음계에 맞춰

내 노래 조율하는 법을 몰라 

 

내 노래는 내가 죽어도

내 목 밖에서 객처럼 서성거릴 것인가

밤새 내 영혼을 두드리는

하얀 비 

 

 

 

ㅡ계간주변인과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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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뚫고 꽃이 피었다

 

강미정 

 

 

오동나무 이파리 휘청휘청 뛰면서 비에 젖는다

여린 씨앗들 고요히, 젖은 날을 들어 올렸다

비가 오는 중에도 비를 뚫고,

빗방울을 젖히며 꽃이 피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스스로 부풀어가는 꽃,

부푼 중심은 깊다 어두운 동굴같이 긴

꽃에서부터 열매에게로

길에 이어져 있는 길, 끝없는

고단한 첫걸음을 내딛고

여린 꽃잎이 비를 받아내며 팔락팔락 춤춘다

은빛 가루를 부리며 나비가 훨훨 날아오른다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족구를 한다

굵은 빗속에 맑은 하늘이 쫙 펴진다

자신의 하늘만한 꽃을 피웠다

제 빛깔을 펼치는 것들은 비를 뚫고

꽃으로 피었다

   

   

 

시집『상처가 스민다는 것(천년의시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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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덕순

 

 

암만 흔들어봐라

열어주나

 

모질게 갔으면 그만이지

왜 다시 와서 지랄여

 

꽃 피면 넌가 했던 거

바람 불면 넌가 했던 거

이젠 아녀

 

그려 왔으면

실컷

울다나 가라 그만


 

-시집 팽팽한 이별(지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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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장례식

박지웅


떨어진 빗방울들이 육신을 모으고 있다
흩어진 손톱들을 찾아 주섬주섬 손가락마다 붙이고
연잎에 떨어진 눈망울을 공들여 끼워 넣는다
눈을 가진다는 것은 눈물을 보일 수 있다는 것
이제 비는 눈을 뜨고 처음으로 비를 바라본다
세상의 모든 가족은 유족이니
우리 슬픔에 언제나 젖과 꿀이 흐르는 까닭을 알리라
눈물을 보였을까, 꽃향기 배었을까
그것들이 뻐근하게 맺히면서 갈비뼈를 이루자
비는 곧장 개울로 흘러가 오랫동안 무릎을 다듬었다
그러고 몸을 일으키자 마침내 풍경이 펼쳐졌다
봄이었다, 빗방울들이 나지막이 땅을 두드려
오래전 숨진 꽃들의 뼈를 맞추어 일으키고 있었다
노래들, 지구와 똑같은 무게로 존재하는 꽃들
날 저물도록 제 가슴을 꽃 위에 쓸어내리는 비들
저 비들은 희망보다 오래되었으니 오래 사느니
이 땅의 모든 무덤에서 비의 유적을 발견하리라
그렇게 날이 개자 비는 다시 손톱을 빼고
무릎을 꿇어 갈비뼈를 하나씩 땅에 묻었다
연잎 위에 눈빛 하나 올려두고 떠났다



ㅡ시집『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북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