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서 피는 꽃
김광기
그늘의 시멘트가 부서져 있다.
햇빛을 받은 벽면들은 멀쩡하지만
그늘이 진 바닥에는 수많은 균열이 피어났다.
균열의 집에 피어난 무수의 꽃,
그림자 꽃들의 무늬가 바닥에 즐비하다.
처음부터 꽃이 피지는 않았다.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지나가고
안개와 먹구름이 다녀가면서
그늘이 숨겨놓은 꽃씨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화분에 기생하던 풀꽃들이
씨를 퍼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거뭇거뭇 시멘트 벽면을 뚫고 들어가는 힘을
소름 돋게 바라본 적이 있다.
미물일수록 왜 그렇게 생의 집착은
크기만 한 것인지,
풀씨들이 온힘을 다해 씨알을 터트리는 것처럼
어둡고 침울한 것들은
제 온힘을 씨알에 담고 있다.
그 어떤 바닥이든 바닥으로 침입하면서
제 삶의 무늬를 꽃처럼 수놓고 있다.
못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못을 친다.
푹, 푹, 깊은 살점 짓찢는다.
저리고 저린 통증을 안기며
조화롭고 단정한 수평이 될 때까지
깊숙이, 깊숙이 못을 박는다.
견고하고 완벽하게 이쪽과 저쪽을 붙인다.
거슬거슬한 못 대가리와 나뭇결을 쓰다듬는다.
상처로 인해 이렇게 견고한 것이,
이렇게 완고한 벽과 벽의 이음이
삭고 또 삭아서 어느 날에는
상처만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처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단절이다.
검푸르고 반들반들한 못,
시퍼렇게 그 위용을 드러낸 대못을 집어 들고
몸이 떨어져 덜렁거리는 벽을 잡는다.
벽과 벽 틈을 붙이고 못질을 한다.
닭 날다
날개를 갖고 있으면서도 날지 못하는 것들은
새였던 전설을 갖고 있다.
치사하게 자잘한 것 갖고 싸운다고 하지만
싸움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전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새는
제 날개를 기형이 되어버린 팔쯤으로 안다.
작고 몹쓸 것이 날카롭다.
상처를 내기에는 그만이다.
닭이 바닥을 박차며 위로 치솟을 때는
오직 부리와 발톱을 상대에게 겨눴을 때이다.
사소함만으로 밀어붙인 것들이
밑바닥에 추락해있는 것을 본다.
날갯짓만으로도
상대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날지 않는 것들과 날지 못하는 것들이
오랜 시간 뒤에는 같은 전설을 갖게 된다.
분열
절망적인 공간이
갈라지는 세계, 몸이 움직인다.
간절함은 애초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다만 들끓는 욕망만이
제 힘을 견디지 못해 뒤틀리고 있을 뿐이었다.
중력과 부력 사이
상관계수를 알고 있어야 한다.
가느다란 떨림을 잡고 있는 인내도 있어야 한다.
저주파 음폭을 절제시켜야 하는
나는, 이 세계 속의
공간이 아닌
내 힘으로는 가늠키도 어려운
시간 속에 박혀 있다.
박제된
나비, 부분 부분의 생이 살아서
아직도 꿈처럼
날개를 퍼덕거린다.
푸른 자유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늘 푸르다.
겨울에는 잠깐씩 멈칫거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름에는 살판난 듯 한층 더 뽐내기도 하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햇살 쪽으로
잎을 활짝 벌리며
푸르른 존립을 맘껏 누리고 있다.
나무가 들어오던 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겸손하고 착한 사람,
무엇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꺽다리나무까지 들고 오더니
저 나무고향으로 서둘러 가버렸다.
산야의 나무가 되어
겨울에는 모든 잎을 다 지우고
숙연하게 묵상하는 자유의지를
이 나무는 알고 있는지,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계절의 틈새에서
소곤소곤 삶의 터를 넓히려는
다른 나무들의 푸르른 생존의지를 알고는 있는지,
뿌리가 공중에 들려
이리저리 옮겨지는 것이 자유가 아닌 것을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십년을 하루같이 영어(囹圄)의 몸으로
맘껏 햇살을 받아들이고만 있다.
―시집『시계이빨』(시산맥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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