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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표 - 봄 / 어느 봄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2. 2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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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표

 

 

유리창 밖은 봄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내민다. 

십 리 밖 강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물고기들의 삶을 살듯 

새들은 새들의 삶을 산다. 

나무들은 나무들의 삶을 산다. 

말 걸지 말자. 

물고기들은 강물에 

새들은 하늘에 

나무들은 숲속에 

나는 유리창 안에 있다. 

말 걸지 말자, 말 걸지 말자. 

느린 듯 더딘 듯 

불쑥 왔다 울컥 가는 봄.

 

 

 

시집슬픈 암살| (북인, 201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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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이능표 

 

 

어느 봄날 나는 우리 집

어느 강 언덕에서 언덕을 훔치고

쓰러질래요

투명한

가난을 창문처럼 열고 하늘을 봤어 나는

텔렉스 학원에 다니는 누이동생의 핸드백을 열고 구겨진

종이배를 타고 도망칠래요

눈부신 봄이 와도 그치지 않는 폭설

속으로 갈래요

나는,

새들이 반짝이는 나뭇가지 속에 쌓인 눈 위에 찍혀

있다 봄에도

눈이 왔다 봄에도

눈발은 날아올라 그 누구의 아늑한

지하가 되는 것일까, 찻잔도

떨어지면 높은 음계 위에 제 육신을 누이고 비로소

깨어지고 깨어져야만

평화를 얻을지어다 하느님 내 방에

임하소서

눈발이 날리는

어느 봄날이 저물 무렵 우리 집 모든 눈밭 위에

여윈 등뼈를 찍고 조금씩만 안심하는

이 명백한 가난만이 창문이 되는 어느 언덕에

살고 있는 눈송이들, 슬픈

눈송이들은.

     

 

 

시집이상한 나라(사람들 재출간, 2015 / 초판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