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현감 전 상사리
공광규 시인의 〈담장을 허물다〉를 읽고
호병탁
근자에 흙 담장 좀 허물고 감히 스스로 영주라 칭하며
보령땅 오서산 포기하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는 청양고을 공 선비의 기고만장에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금강 나가는 장곡천변 논 몇 마지기 제 소유로 하더니
이제는 소생 관할인 외산 무량사까지 운운하니
저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집니다
한양까지 이 얘기가 파다하니 어찌 이런 해괴한 일이 생겼는지
마음 같아서는 즉시 군사 일으켜 한치고개 치달아 올라
내리 송방리까지 덮쳐 내려가고 싶소이다마는
일찍부터 군자의 덕을 사모하는 저로서는 세상 시끄럽게 하는 일 자중하고
애만 폭폭 끓이고 있습니다
잠 못 이루고 사서삼경 두루 살피다가
기막힌 묘책 얻었은즉 저의 충정을 헤아리시고
속히 일을 수행하시어 만백성의 평화와 팔도의 안정을 도모하소서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영감님도
현청의 늘르리 기와 담장부터 냅다 허물어 버리십시오
공 선비의 시골 흙담장과 어디 비교나 되겠습니까
당장 대천 앞바다가 푸른 짐승처럼 뜰에 어슬렁거릴 것이고
시원한 파도소리가 영감님 편한 잠자리를 거들 것입니다.
수평선 너머 요녕성주와 친선의 고량주를 나누며
넌지시 발해영역에 대해서도 운을 띄울 수 있을 겁니다
낙숫물 떨어진 데 또 떨어집니다
이번에 담장 부숴대는 것을 보니 공 선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 또 무얼 부수고 무슨 큰일 벌일지 모릅니다
결국 공 선비가 노리는 것은 용자 고운 따님입니다
힘센 말 매 놓으면 기둥이 쉽게 상한다는 것 명심하십시오
하오니
이달 그믐 어둔 밤
사람 눈 안 띄게 따님 나귀 태워 살짝 몸만 제게 보내십시오
따님이 제 사람 된 걸 알면 그래도 글줄이나 읽은 선비가
무슨 큰 사단 다시 벌이겠습니까
공주, 홍성에도 미리 기별을 놓아두겠습니다
네 고을 사이에 낀 공 선비 차령의 산기슭에서
조용히 다시 서책이나 가까이 하겠지요
인편에 산삼 몇 뿌리와 가양주 한 말 보내오니
연을 맺은 증표로 거두어 주소서
—월간『유심』(201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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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 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계간『창작과비평』(2012. 가을)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3 오늘의 좋은시』(2013,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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