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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재봉 / 등신불 / 봄날은 간다 / 나는 기도한다 / 언제 울어야 하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1. 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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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


―김종철 (1947∼ )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한 가봉(假縫),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 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는 신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레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儀式)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직조(織造)의 방에 누워
내 동상(凍傷)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단,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 일을 엿듣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6』(동아일보. 2012년 12월 28일)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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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불

 

김종철

 

 

등신불을 보았다.
살아서도 산 적 없고
죽어서도 죽은 적 없는 그를 만났다.
그가 없는 빈 몸에
오늘은 떠돌이가 들어와
평생을 살아간다

 


(『제13회 정지용문학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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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김종철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한 스무 해쯤 꽃 진 자리에

   

그냥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일 마음 같진 않지만  

 

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 깨침에 꽃 피었다  

 

가진 것 다 잃어버린  

 

저기 저, 발가숭이 봄 

 

쯧쯧  

 

혀끝에서 먼저 낙화합니다

 

 

 

시집 못의 귀향(도서출판 시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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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도한다

 

김종철

 

 

매일 아침

기도가 머리에서 한 움큼씩 빠졌다

마른 장작처럼 서서히 굳어가는 몸

한 방울씩 스며든 항암주사액에

생의 마지막 잎새까지 말라버렸다.

 

내 명줄을 쥐고 있는

아내의 하느님만

오츠보, 시이나, 야마다를 불러주셨다

이쯤에서 함께 걷는 인연을 주셨고

기적은 사마리아인의 것만이 아니었다.

신을 모르는 일본 의사들이

빛으로 나의 죽음을 태워주었다.

 

그래 그렇구나, 막상 생의 시간 벌고 나니

청명에 죽느냐, 한식에 죽느냐구나

나는 기도한다.

나를 살려준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계간『푸른 사상』(201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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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울어야 하나

 

김종철

 

 

내가 병을 얻자

멀쩡한 아내가 따라서 투병을 한다

늦도록 엔도 슈샤쿠를 읽던 아내는

독한 항암제에 취한 나의 기도에

매일 밤 창을 열고

하느님을 직접 찾아 나섰다 

 

길면 6개월에서 1

주치의 암 선고 들었던 날 밤

날 보아요 과부상이 아니잖아요

병실 유리창에 얼비친

한강의 두 눈썹 사이에 걸린

남편을 보며

애써 웃어 보이던 아내

그래그래 아직은 서로 눈물을 보일 수 없구나

아무리 용 써봤자 별수 없다는 것을

아는 당신과 나,

   

 

 

유고시집 절두산 부활의 집(문학세계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