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부부 시 모음- 함민복/문정희/이기철/황성희/최문자/오창렬/김석/김소월...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2. 5. 09:46
728x90

 

부부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이문재 엮음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이레, 2007)

 

 

---------------------------------------------

부부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부부란 서로를 묶는 것이 쇠사슬인지

거미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묶여 있는 것만이 확실하다고 느끼며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그런 사이이다

 

 

 

계간문학수첩(2008년 가을호)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시집 『양귀비꽃 머리에』(민음사, 2004)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1』 (조선일보 연재, 2008)

 

-------------------------------

부부

 

이기철

 

 

이 세상 가장 비밀한 소리까지

함께 듣는 사람이 부부다

식탁에 둘러앉아 나란히 수저를 들고

밥그릇 뚜껑을 함께 여는 사람

이부자리 속 달걀만한 온기에도

고마워할 줄 알고

저녁놀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하루를 떠나 보내는 사람

 

적금통장을 함께 지니고

지금은 떠나 있는 아이들 소식 궁금해하는 사람

언젠가 다가올 가을 으스름 같은 노년과

죽음에 대해서도 함께 예비하는 사람

이 나무와 저 나무의 잎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때

살 닿음의 온기 속에 서로의 등을 뉘이며

머리카락 스쳐 간 별빛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

이 나무와 저 나무처럼 가장 가까이 서서

먼 우레를 함께 듣는 사람

 

 

 

월간현대문학(201310월호)

 

 

-----------------------

부부

 

황성희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 웬수'

 

어머니의 눈망울 속 가랑잎이 떨어져 내린다

충돌과 충돌의 포연 속에서

본능과 본능의 골짜구니 사이에서

힘겹게 꾸려온 나날의 시간들이

36.5 말의 체온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운

평생의 웬수

 

 

CBS FM 저녁스케치 939 발간 길에게 길을 묻다(나무생각, 2005)

 

 

-------------------

부부

 

최문자

 

 

그들

정말이지

한 순간이 빛이었다 어둠이었다 해요

오랫동안 굶은 남자와

오랫동안 배부른 여자가

걷고 걸어서

빡빡한 돌짝밭에서 만났어요

서로가 서로를 굶었으므로

멀거니 바라보다

길을 잃었죠

살이 있고 뼈가 없는 것처럼

미지근한 것보다 더 굴욕적인 건 없죠

결코 서로의 발목에서 마음껏 찰랑거리지 않죠

그들

헤어지는 빛과 어둠이에요

옆에 두고도

찾을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을 찾아서

서로가 서로를 굶다가

반대쪽에서 화들짝 놀라죠

그들

정말이지

잘도 마음이 오그라붙죠

 

 

 

계간 시안(2009년 여름호)

 

 

------------------------------

부부 

 

오창렬

   

 

늘 허투루 나지 않은 고향 길  

장에 나갔다 오는지 보퉁이를 든 부부가  

이차선 도로의 양끝을 팽팽하게 잡고 걷는다  

이차로 간격의 지나친 내외가  

도시 사는 내 눈에는 한 없이 촌스러웠다  

속절없는 촌스러움 한참 웃다가  

인도가 없는 탓인지도 모르지  

사거니 팔거니 말싸움을 했을지도 몰라  

나는 또 혼자 생각에 자동차를 세웠다  

차가 드물어 한가한 시골길은  

늙어 가는 부부는 여전히 한쪽씩 맡아 걷는다  

뒤돌아봄도 없는 걸음이 경행經行 같아서  

말싸움 같은 것은 흔적도 없다  

남편이 한쪽을 맡고 또 한쪽은 아내가 맡아  

탓도 상처도 밟아 가는 양 날개  

안팎으로 침묵과 위로가 나란하다  

이런저런 궁리를 따라 길이 구불거리고  

묵묵한 동행은 멀리 언덕을 넘는다  

소실점 가까이 한 점 된 부부  

언덕도 힘들지 않다

 

   

 

안도현 엮음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이가서, 2006)  

 

 

--------------------------------

부부 

 

김석 

 

 

비 오는 날

길을 걸으며 알았다 

 

구멍이 난 신발

밑창 사이로 물은 스며들고

젖은 양말 속

발가락이 말랑말랑하다 

 

비가 고인 물 덤벙 지나

바닥을 뚫고

올라온 질퍽질퍽한 물과

딱딱한 발이

하나가 되어 촉촉하다 

 

길을 걸으며

구멍이 난 줄 모르고 산

날들의 밑창은 새고

서로가 젖어 있다는 것을

 

눈물은 상처를 적지고

상처는 눈물 속에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는 것을 

 

비 오는 날

길을 걸으며 나는 알았다

 

 

 

―『대구문학(20121-2월호)

 

 

 

 

------------------------------------

부부(夫婦)

 

 

김소월

 

 

 

오오 안해여, 나의 사랑!

하늘이 묶어준 짝이라고

믿고 살음이 마땅치 아니한가.

아직 다시 그러랴, 안 그러랴?

이상하고 별나운 사람의 맘,

저 몰라라, 참인지, 거짓인지?

정분(情分)으로 얽은 딴 두 몸이라면,

서로 어그점인들 또 있으랴.

한평생(限平生)이라도 반백년(半白年)

못 사는 이 인생(人生)!

연분(緣分)의 긴 실이 그 무엇이랴?

나는 말하려노라, 아무려나,

죽어서도 한 곳에 묻히더라.

 

 

 

-------------------

부부론

 

공광규

 


오늘은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결혼은 삼겹살을 굽는 것이네
타지 않게 골고루 잘 익혀야 하는 것이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불꽃을 조절하고
알맞게 익도록 방심하지 않는 것이네


결혼은 된장국을 끓이는 것이네
알맞은 양을 물에 풀고
양념을 넣고 자꾸자꾸 간을 보는 것이네
된장과 양념의 조화를 맞추는 것이네
그걸 몰라서 아내가 없이 밥을 먹네
된장을 끓이고 오래된 반찬을 내놓고
아이들과 둘러앉아 삼겹살을 굽네
집나간 아내를 욕하면서 걱정하면서.

 

 


―계간『시와 정신』(2008년 가을호)

 

 

------------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월간현대시학(200410월호)

 

 -----------

2인용 자전거 타기


문숙


 

결혼이란 안장과 체인이 두 개 달린 자전거를 타는 일이지
앞사람이 페달을 밟아 뒷바퀴를 끌면
뒷사람은 발을 맞추면 된다네
마음이 합쳐지지 않으면 바퀴는 구르지 않지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다 보면
두 바퀴를 물고 있던 체인이 쉽게 벗어나기도 한다네
그럴 땐 자전거를 세우고 다시 체인을 걸어야 하지
앞바퀴와 뒷바퀴를 묶으며 기름때를 묻히기도 한다네

 

한 번 벗어난 체인은 쉽게 고정되지 않지
시간을 흘리며 생을 낭비하기도 한다네
짐이 돼버린 자전거를 끌며 서로를 원망하기도 하지
지쳐 있는 두 사람은 목적지가 멀기만 하다네

 

각자 길을 되돌아보며
바퀴에 감긴 시간을 계산해 보기도 한다네
그러다가 문득 뒷바퀴를 돌려서 앞바퀴를 굴릴 생각을 하지
때로는 뒷바퀴가 앞바퀴를 밀고 가기도 한다네

 



계간『너머』(2007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