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불놀이
주요한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팔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 우에서 내려다보니, 물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햇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우에 내어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은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이 설음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 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속에······ 그런데 행여나 불쌍히 여겨줄 이나 있을까······ 할 적에 통, 탕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우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짓는 듯 아아 좀더 강열한 열정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햇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사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淸流壁) 모란봉 높은 언덕 우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봄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졸음 오는 ‘이즘’의 형상이 오락가락―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 소리, 달아논 등불 밑에서 목청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을 이끄는 불구경도 이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이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으며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없는 장구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 이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뜩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뜻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한 웃음 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가슴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밤! 너의 빨간 햇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 『불놀이』.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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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봄을 바라 주요한 푸른 물 모래를 비추고 흰 돛대 섬을 감돌며, 들 건너 자주빛 봄 안개 설움 없이 울 적에, 서산에 꽃 꺾으러, 동산에 님 뵈오러 가고 오는 흰옷 반가운, 아아 그 땅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뜨거운 가을해, 묏견에 솔나무길이 못 되고, 어린 아우 죽은 무덤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적은 동리 타작마당, 잠자리가 노는 날, 꿈 같은 어린 시절 찾으러, 아아 그 산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아침에 저녁에 해묵은 느릅나무 가마귀 울고 담장에 가제 푸른 넝쿨, 다정한 비 뿌릴 제 섬돌빛 누른 꽃을 뜯어서 노래하던, 지붕 낮은 나의 고향집, 아아 그 봄을 바라, 그대와 함께 가 볼거나……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불놀이』.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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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송(田園訟)
주요한
전원으로 오게, 전원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가져 오나니.
익은 열매와 붉은 잎사귀―
가을의 풍성은 지금이 한창일세.
아아 도회의 핏줄 선 눈을 버리고
수구러진 어깨와 가쁜 호흡과
아우성치는 고독의 거리를 버리고
푸른 봉우리 솟아오른 전원으로 오게, 고게.
달이 서러운 밭도랑을 희게 비치고
얼어 붙은 강물과 다리와 어선 위에
눈은 내려서 녹고 또 꽃 필 적이
우리들의 깊이 또 고요히 묵상할 때일세.
전원으로 오게, 건강의 전원으로.
인공과 암흑과 시기와 잔혹의 도회
잠잔 줄 모르는 도회 달과 별을 향하여
어리석은 반항을 하는 도회를 떠나오게.
노래는 드을에 가득히 산에 울려나고
향기와 빛깔은 산에서 드을로 퍼져간다
아름다운 봄! 양지에 보드랍게 풀린
흙덩이를 껴안고 입맞추고 싶은 봄.
그러나, 보라 도회는 피 빠는 박쥐가 깃들인 곳
흉한 강철의 신 앞에 사람사람이
피와 살과 자녀까지 비쳐야 하는
도회는 문명의 막다른 골, 무덤.
전원으로! 여기 끊임없는 샘물이 솟네.
여기 영원한 새로움이 흘러나네.
더운 태양과 건강한 대지의
자라나는 여름의 전원으로!
아아, 그때에 새 예언자의 외치는 소리가
봉우리와 골짜기를 크게 울리리니
반역자가 인류의 유업을 차지하리니
위대한 리듬의 전원으로 오게, 오게.
(『불놀이』.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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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주요한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불놀이』. 미래사. 1991)
봄비에 바람 치여 실같이 휘날린다
종일 두고 뿌리어도 그칠 줄 모르노네
묵은 밭 새 옷 입으리니 오실 대로 오시라
목마른 가지가지 단물이 오르도록
마음껏 뿌리소서 스미어 들으소서
말랐던 뿌리에서도 새싹 날까 합니다.
산에도 나리나니 들에도 뿌리나니
산과 들에 오시는 비 내 집에는 안 오시랴
아이야 새밭 갈아라 꽃 심을까 하노라
개구리 잠깨어라 버들개지 너도 오라
나비도 꿀벌도 온갖 생물 다 나오라
단 봄비 조선에 오나니 마중하러 갈거나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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