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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뿌리에게/뿌리로부터 - 카톡 좋은 시 126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6. 2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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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 좋은 시 126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 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1989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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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계간예중앙(2011. 겨울)

시집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지, 2014)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 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1989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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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계간예중앙(2011. 겨울)

시집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지,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