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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도/이시영 - 카톡 좋은 시 128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5. 6. 30.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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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 좋은 시 128 

    후꾸도

   이시영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시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 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닌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 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어주며
   멀둥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못 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삿밥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식전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위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서커스를 한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는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따리를 들고
   주춤주춤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오지 않았다
   장사나 잘 도는지 몰라
   천자문은 다 외웠는지 몰라
   칭얼대는 네댓살자리 계집애를 업고
   하염없이 좌판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사내
   그리움에 언뜻 다가서려고 하면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를 눌러쓰고
   이내 좌파에 달라붙어
   사과를 뒤적거리는 사내 

 

   ―시집『만월』.창작과비평사. 1976)

 

 

 

후꾸도


이시영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시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 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닌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 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어주며
멀둥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못 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삿밥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식전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위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서커스를 한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는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따리를 들고
주춤주춤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오지 않았다
장사나 잘 도는지 몰라
천자문은 다 외웠는지 몰라
칭얼대는 네댓살자리 계집애를 업고
하염없이 좌판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사내
그리움에 언뜻 다가서려고 하면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를 눌러쓰고
이내 좌파에 달라붙어
사과를 뒤적거리는 사내

 

 

 

(『만월』.창작과비평사. 197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