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130 구정동아 구정동아 고정희
어느 가난한 여자의 변론을 들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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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동아 구정동아
고정희
예수께서 재림한 날이 다소 가까워지자 구정동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에 앞서 사람을 보내셨다 그들은 먼길을 떠나 구정동에 당도하자 예수가 머물 거처를 수소문하였으나 구정동 주민들은 그런 수상한 자를 차고에서라도 재울 수 없다며 집안에 맞아들이기를 단연 거절하였다 또 이 지역을 순회하던 방범대원은 주민등록마저 없는 자가 어찌 언감생심 구정동 금파트에서 이슬 가릴 생각을 하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를 본 제자 김교신과 함석헌이 주님, 씨알 없는 땅에서 미련을 거둘까요, 하고 물었으니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고 나서 구정동 사랑가를 부르시며 목놓아 우셨다
아직도 내가 너를 짝사랑하는구나
구정동아, 구정동아,
아직도 내가 너를 짝사랑하는구나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땅에 내 백성이 거하지 않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품어안 듯
내 너를 안으려 얼마나 애썼더냐
네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할 날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그 때마저 너는 거절하였다
이제 나는 너를 어쩌란 말이냐
이 땅에서 가장 고독한 백성아
오늘 너와 내가 이별이란 말이냐?
몸 푸는 여자처럼 내 아픔이 크구나
내가 너를 다시 찾는 날은 없으리라
너와 나 사이에 이별이 있다면
네 땅에서 내가 내쫓기는 이별이요
내 나라에서 네가 버림받는 이별이다
일찍이 두로와 시돈이 너와 같지 않았더냐
구정동아, 구정동아, 구정동아
시대의 재난이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에
너는 망령보다 고약스런 거드름을 피우며
가난한 백성과는 상종조차 멀리하고
축재를 뽐내는 특권층이 되려느냐?
탐욕의 피라미드에 금테를 덧입히고
피묻은 바벨탑에 장식을 매달면서
교만의 기운이 문전마다 꽉 찼구나
네 몸에서 나는 썩은 냄새가
밤마다 내 침상을 둘러싸는구나
향유를 말로 부어도 소용없다
내 미련이 이리 큰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너를 태어나게 하지 말 것을
너희에게 내린 물질의 기적을
판자촌과 동두천에 내렸더라면
네 타락이 그리 깊지 않았을 것을
그 날에 포주와 살인범이
너보다 다행스럽다 말하게 되었구나
강남아, 가파르나움아
가혹하고 고통스런 환란의 시대에
내 백성의 피땀으로 호화스럼을 누린 자는 다
무서운 폐허에 떨어질 것이다!
정녕 나는 너를 어쩌란 말이냐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땅에 내 백성이 거하지 않는구나
어느 가난한 여자의 변론을 들으심
제자들이 부자 동네에서 묻은 신발의 먼지마저 다 털고 난 후 예수의 발길을 재촉할 제 돌연 행색이 초라하고 두 눈에서 광채가 나는 한 여자가 다가와 예수의 발길을 가로 막았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으실이여,
이 땅에서 등돌림을 조금만 늦추소서
이 땅에서 연민을 거두지 마소서
땅에 목숨 부지하는 백성에게는
공평한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이 그 하나요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그 둘이며
하늘 땅 중간에서 생성하는 공기가 그 셋입니다
햇살과 물과 공기 중 그 어느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살아남지 못하옵니다
그러나 이 공평한 것 세 가지가 있는 땅 어디서나
하느님 나라의 씨알인 죄없고
순결한 어린 영혼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옵니다
무릇 먹이를 앞에 놓고 단식할 소가 어디 있으며
스스로 어항을 떠날 물고기가 어디 있으리까
우리에겐 이제 완전한 의인 열 사람도
영원히 멸망의 흑암에 떨어질 악인도 없는 듯싶사옵니다
당신의 못된 교회더러 그 명단을 제출해보라 하소서
그 판단을 따르시겠습니까
지사라 칭송받는 이들에게 그 척도를 제시해보라 하소서
그 잣대를 믿으시겠습니까
당신은 타락을 징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에
그 오심 속에 이미 척도가 있습니다
애초부터 불안전한 인간에게 완전을 요구하지 마시고
완전해지려는 마음을 받으소서
그리하여 선과 악의 사선을 넘고 있는 우리 모두
공평한 구원의 햇살을 받게 되기까지
이것이 재림의 완성이옵니다
마음을 돌리신 예수
땅바닥에 지팡이로 묵묵히 금을 긋고 계시던 예수께서 여자를 향하여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자매여, 네 사랑이 믿음을 구했다
그대 속에 인류의 어머니가 있노라
세상은 여자도 구원받는다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가자, 그대 처마 밑에서 하룻밤을 묵으리라
그대 거처를 근심하지 말라
나는 대접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의 고난을 싸매러 왔다
그대 고통이 서려 있는 처마 밑이면 족하다
그리고 앞장 서 일행과 함께 산동네 비탈길을 향하셨다 찬란한 햇빛이 그 뒤를 따랐다
―유고시집『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고정희 지음『고정희 시전집 세트 2』(또하나의문화,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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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예수
정호승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람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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