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131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박시교
―시집 (독작(獨酌)도서출판 작가. 2004)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박시교
그리운 이름 하나 가슴에 묻고 산다
지워도 돋는 풀꽃 아련한 향기 같은
그 이름
눈물을 훔치면서 되뇌인다
어머니
―시집 (독작(獨酌)도서출판 작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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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박형준
낮에 나온 반달, 나를 업고
피투성이 자갈길을 건너온
뭉툭하고 둥근 발톱이
혼자 사는 변두리 창가에 걸려 있다
하얗게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나가버린,
낮에 잘못 나온 반달이여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학과지성사. 199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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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박성우
끈적끈적한 햇살이
어머니 등에 다닥다닥 붙어
물엿인 듯 땀을 고아내고 있었어요
막둥이인 내가 다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일요일이었던 그날
미륵산에 놀러 가신다며 도시락을 싸셨는데
웬일인지 인문대 앞 덩굴장미 화단에 접혀 있었어요
가시에 찔린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엉덩이 들썩이며 잡풀을 뽑고 있었어요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어머니,
지탱시키려는 듯
호미는 중심을 분주히 옮기고 있었어요
날카로운 호밋날이
코옥콕 내 정수리를 파먹었어요
어머니 미륵산에서 하루죙일 뭐허고 놀았습디요
뭐허고 놀긴 이놈아, 수박이랑 깨먹고 오지게 놀았지
―시집『거미』(창작과비평,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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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시영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도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 게 벌써 삼년 전인가요?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청소 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층 7호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조각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해도
깨끗한 낭하 아래론 까마득한 낭떠러지
말 붙일 사람도 걸어볼 사람도 아예 없는
격절의 숨막힌 공간
철컥거리다간 꽝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
어머니 차라리 창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당신이 지나쳐온 수많은 자죽
그 갈림길마다 흘린 피눈물들을 기억하세요
없는 집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
광주 종방의 방직여공이 되었던 게
추운 열여덟 살 겨울이었지요?
이 틀 저 틀로 옮겨 다니며 먼지구덕에서 전쟁물자를 짜다
해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시집이라 보내준 것이 마름집 병신아들
그 길로 내차고 타향을 떠돌다
손 귀한 어느 양반집 후살이로 들어가
다 잃고 서른이 되어서야 저를 낳았다지요
인공 때는 밤짐을 이고 끌려갔다
하마터면 영 돌아오지 못했을 어머니
죽창으로 당하고 양총으로 당한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요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에게 밥해주고
밤사람이 들어오면 밤사람에게 밥해주고
이리 뺏기고 저리 뜯기고
쑥국새 울음 들으며 송피를 벗겨
저를 키우셨다지요
모진 세월도 가고
들판에 벼이삭이 자라오르면 처녀적 공장노래 흥얼거리며
이 논 저 논에 파묻혀 초벌 만벌 상일꾼처럼 일하다 끙
당을 이고 들어오셨지요
비가 오면 덕석걷이, 타작 때면 홑태앗이
누에철엔 뽕걷이, 풀짐철엔 먼 산 가기
여름 내내 삼삼기, 겨우내내 무명잣기
씨 부릴 땐 망태메기, 땅 고를 땐 가래잡기
억세고 거칠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머슴들 속에 서면 머슴
밭고랑에 엎드리면 여름 흙내음 물씬 나던
아 좋았을 어머니
그 너른 들 다 팔고 고향을 아주 떠나올 땐
나 죽으면 일하던 진새미밭 강 묻어 달라고 다짐다짐 하시더니
오늘은 이 도시 고층아파트의 꼭대기가
당신을 새처럼 가둘 줄이야 어찌 아셨습니까
엘리베이터가 무겁게 열리고 닫히고
어두운 복도 끝에 아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오늘도 구석방 조그만 창을 닫고
조심조심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흰 머리 파뿌리 같은 늙으신 어머니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4』(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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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생각
이시영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외출할 때나 출근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돌아와 문 앞에서 쓸어내렸던 수많은 가슴들이여
아가 아가 우리 아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나 자장가 불러드리며 손목에 묶인 매듭 풀어드리면
장난감처럼 엎질러진 밥그릇이며 국그릇 앞에서
풀린 손 내미시며 방싯방싯 좋아하시던 어머니
하루 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
―월간『현대시학』(2011,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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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양명문
어머니,
마음 푸욱 놓으시고
어서 여기 앉아 계셔요.
봄이면 살구꽃 곱게 피고,
가을이면 대추 다닥다닥 열리는 집 들,
네모났던 섬돌이 귀가 갈리어
두루뭉실하게 된, 진짜
우리 집이올시다.
어머니,
아무런 일이 일어나도,
가령 땅 위에다
꿇는 피로 꽃무늬를 놓더라도,
여기를 떠나지 마시고
앉아 계셔요.
여기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적부터,
돌도끼로 나무 찍던 그 옛날부터 살아 온,
하늘 맑고 물 맑은 동네.
여기는
아들의 아들 아들 아들,
아들의 아들 아들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 아들 아들들이
살아야 할, 잘 살아야 할, 진짜
아들의 땅이니까요.
어머니,
여기 앉으셔요.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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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김초혜
한 몸이었다가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계간『주변인과詩』(2010.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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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오세영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 시집『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시와 시학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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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성부
서 있는 뒷모습에 힘이 꿈틀거린다
머리에 인 광주리 기름병 꼭지 하늘로 뾰족하고
옷 소매 걷어 올린 팔뚝과 불끈 쥔 두 주먹
강동한 치마 아래 두 종아리가 저리 뻣뻣하다
어지러운 세상의 얼굴 속에서도
사랑을 품고 나아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당당한 법이다
내 책상머리에 삼십여 년째 놓여 있는 박수근의 목판화 기름 장수 아낙
마주 앉을 때마다 설악 용아릉*의 험한 바위들과
낭떠러지와 거기 용솟음치는 기운이 내 앞에 나란히 놓인다
위를 겨냥하는 것들은 한결같이 불끈불끈 용틀임을 하지만
언제나 그 안에 슬픔을 다독이며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패배에 고개 숙인 짠한 몰골이 아니라
어려운 삶을 헤쳐나가는 씩씩한 두 다리와
두 팔과 어깨의 저 완강함
가장 낮은 고무신 코도 위를 향하는 저 날카로운 길항佶抗
세계가 그 앞에 엎드려 무릎 꿇게 하는 저 뜨거운 응축凝縮
저 피 울음 다음의 굳센 기립起立과
노여움을 삭여 힘으로 바꿔 만드는 저 고요함이
뒷모습에 그대로 꽃피고 있는 것 나에게는 잘 보인다
* 설악산 내설악의 용아장성능선.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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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문숙
부엌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스위치를 당겨도 쉽게 스파크가 일지 않는다
빛이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아 깜박거린다
하얗던 몸속으로 검은 시간이 스민다
양 모서리가 캄캄해져 온다
긴 시간 나를 굽어보며
내 모퉁이를 환하게 비추던 한 생애가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ㅡ시집『단추』(천년의시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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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6
정한모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 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를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새벽』. 일지사. 1975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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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남진원
사랑스러운 것은 모두 모아
책가방에 싸 주시고,
기쁨은 모두 모아
도시락에 넣어 주신다.
그래도 어머니는
허전하신가봐.
뒷모습을 지켜보시는 그 마음
나도 알지.
(『서울 지하철 시』. 3호선 충무로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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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김영무
춘분 가까운 아침인데
무덤 앞 상석 위에 눈이 하얗다
어머님, 손수 상보를 깔아놓으셨군요
생전에도 늘 그러시더니
이젠 좀 늦잠도 주무시고 그러세요
상보야 제가 와서 깔아도 되잖아요
ㅡ제2시집『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창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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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천양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시집『마음의 수수밭』(창작과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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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땅
임영조
한식날 산소에 갔다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사드린 땅
파주군 광탄면 신산리
성당묘원 남향받이 여섯 평
그 한적한 유택(遊宅)에는
바람과 햇살이 자주 놀러와
까만 빗돌 위에 하얀 그리움
가물가물 새겨 넣고 있었다
한평생 어머니의 믿음은
높은 하늘과 정직한 흙뿐
그래서 작은 유택 뜰에도
햇살을 가득 풀어놓고 사실까
바람도 몇 타래 불러들여
창(唱)을 듣고 한시름 잊듯
내내 주무시는 것일까
분향하고 읍하고 잔을 올리면
문득 귀에 쟁쟁 울리는 말씀
(너희들도 별탈 없이 사느냐?)
저승에서 이승으로 타전한
푸른 잔디가 어머니의 안부처럼
자상한 궁서체(宮書體)로 돋아나
새록새록 반갑고 눈이 부셨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1(제2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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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던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 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시집『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문학사상, 2005)
<가져온 곳 : 한국디지털도서관>
http://www.kll.co.kr/element_express/pg_releaseview.php?id_l=221481&pn_0=2&pn_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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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발톱을 깎으며
유강희
햇빛도 뱃속까지 환한 봄날
마루에 앉아 어머니 발톱을 깎는다
아기처럼 좋아서
나에게 온전히 발을 맡기고 있는
이 낯선 짐승을 대체 무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싸전다리 남부시장에서
천 원 주고 산 아이들 로봇 신발
구멍 난 그걸 아직도 싣고 다니는
알처럼 쪼그라든 어머니의 작은 발,
그러나
짜개지고, 터지고, 뭉툭해지고, 굽은
발톱들이 너무도 가볍게
툭, 툭, 튀어 멀리 날아갈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저 왱왱거리는 발톱으로
한평생 새끼들 입에 물어 날랐을
그 뜨건 밥알들 생각하면
그걸 철없이 받아 삼킨 날들 생각하면
-현장비평가가 뽑은『올해의 좋은시』(현대문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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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도
모윤숙
높이 잔물 지는 나뭇가지에
어린 새가 엄마 찾아 날아들면,
어머니는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산 위 조그만 성당 안에 촛불을 켠다.
바람이 성서를 날릴 때
그리고 들리는 병사의 발자국 소리들!
아들은 어느 산맥을 넘고 있나 보다
쌓인 눈길을 헤엄쳐
폭풍의 채찍을 맞으며
적의 땅에 달리고 있나 보다.
애달픈 어머니의 뜨거운 눈엔
피 흘리는 아들의 십자가가 보인다.
주여!
이기고 돌아오게 하소서.
이기고 돌아오게 하소서.
-시집《풍랑》(1951)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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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여보시오― 누구시유 ―
예,저예요 ―
누구시유, 누구시유 ―
아들, 막내아들 ―
잘 안들려유 ―잘.
저라구요, 민보기 ―
예, 잘 안들려유 ―
몸은 좀 괜찮으세요 ―
당최 안들려서 ―
어머니 ―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
두 내우다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
예, 죄송합니다 안들려서 털컥.
어머니 저예요 ―
전화끊지 마세요 ―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
두 내우다 예, 저라니까요!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어머니.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안어들머려니서 털컥.
달포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네
어머니가 자동응답기처럼 전화를 받았네
전화를 받으시며
소 귀에 경을 읽어 주시네
내 슬픔이 맑게 깨어나네
-시집『자본주의의 약속』(세계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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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값
신천희
어머니
당신의 뱃속에
열 달동안 세들어 살고도
한 달치의 방세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몇 년씩이나 받아먹은
따뜻한 우유값도
한 푼도 갚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이승에서 갚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승까지
지고 가려는 당신에 대한
나의 뻔뻔한 채무입니다
―계간『문학선』(200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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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도
모윤숙
높이 잔물 지는 나뭇가지에
어린 새가 엄마 찾아 날아들면,
어머니는 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산 위 조그만 성당 안에 촛불을 켠다.
바람이 성서를 날릴 때
그리고 들리는 병사의 발자국 소리들!
아들은 어느 산맥을 넘고 있나 보다
쌓인 눈길을 헤엄쳐
폭풍의 채찍을 맞으며
적의 땅에 달리고 있나 보다.
애달픈 어머니의 뜨거운 눈엔
피 흘리는 아들의 십자가가 보인다.
주여!
이기고 돌아오게 하소서.
이기고 돌아오게 하소서.
-시집《풍랑》(1951)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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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닮네요
이길원
밤새 고기 재우고 김밥말던 아내가
눈부비는 내게 운전대 쥐어주고
아침해 깨우며 전방으로 달리더니
"필승"이라 외치는 아들어깨 안고 애처럼 우네요
하루내내 기차타고 버스타고
전방에서 하룻밤을 기다리다
철조망 안에서 김밥 보퉁이 펴며
돌아서 눈물 감추던 어머니처럼
아내도 우네요
아픈데 없냐 힘들지 않냐 많이 먹어라
어머니가 제게 하시던 말을
아내도 하네요
손잡아 보고 얼굴 만져 보고
어머니가 제게 눈물 그렁이듯
그렁이네요
아내의 얼굴 속에
팔순 어머니
주름진 얼굴
―시집『계란껍질에 앉아서』(시문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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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자는 어머니
―고형렬(1954∼)
흰 양말에 남자 고무신을 신었다.
통치마 아래 반들거리는 정강이
항포돛색 보자기로 네 귀를 묶고
풀다라를 안고 졸고 있었다.
엷은 구름에 바다는 훤한 새벽
불켜고 버스는 북쪽으로 간다.
자식들의 늦은 등교 찻간에서
나는 동해안 어머니를 자주 보게 된다.
옆구리에 혹마냥 불거진
흔들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보고
나는 해송 달아나는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관광 여름 한철을 따라서
어머니는 주문진으로 나가시는가 보다.
언덕바지나 동구에 삑 설 때마다
찰싹찰싹 어린 파도 소리 들린다.
저러고 눈만 감은 어머니를
나는 바람결에 알고 있다,
어머니는 해변가 여자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조으는 6척 어머니
짚또아리 드신 장사 같은 어머니는
아무 표정도 없이 자고 계신다.
더 위로 위로 오늘은 가시나 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9』(동아일보. 2013년 0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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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레자식
김인육
고향집에서 더는 홀로 살지 못하게 된
여든셋, 치매 앓는 노모를
집 가까운 요양원으로 보낸다
시설도 좋고, 친구들도 많고
거기가 외려 어머니 치료에도 도움이 돼요
1년도 못가 두 손 든 아내는
빛 좋은 개살구들을 골라
여기저기 때깔 좋게 늘어놓는다, 실은
늙은이 냄새, 오줌 지린내가 역겨워서고
외며느리 병수발이 넌덜머리가 나서인데
버럭 고함을 질러보긴 하였지만, 나 역시 별수 없어
끝내 어머닐 적소(適所)로 등 떠민다
에비야, 집에 가서 같이 살면 안 되나?
어머니, 이곳이 집보다 더 좋은 곳이에요
나는 껍질도 안 깐 거짓말을 어머니에게 생으로 먹이고는
언젠가 나까지 내다버릴지 모를
두려운 가족의 품속으로 허겁지겁 돌아온다
고려장이 별 거냐
제 자식 지척에 두고 늙고 병든 것끼리 쓸리어
못 죽고 사는 내 신세가 고령장이지
어머니의 정신 맑은 몇 가닥 말씀에, 폐부에 찔린 나는
병든 개처럼 허정거리며
21세기 막된 고려인의 집으로 돌아온다
천하에 몹쓸, 후레자식이 되어
퉤퉤, 돼먹지 못한 개살구가 되어
―계간『다층』(2009,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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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류시화
시가 될 첫 음절, 첫 단어를
당신에게서 배웠다
감자의 아린 맛과
무의 밑동에서 묻은 몽고반점의 위치와
탱자나무 가시로 다슬기를 뽑아 먹는 기술을
그리고 갓난아기일 때부터
울음을 멈추기 위해 미소 짓는 법을
내 한 손이 다른 한 손을 맞잡으면
기도가 된다는 것을
당신은 내게 봄 날씨처럼 변덕 많은 육체와
찔레꽃의 예민한 신경을 주었지만
강낭콩처럼 가난을 견디는 법과
서리를 녹이는 말들
질경이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내 시는 아직도
어린 시절 집 뒤에 일군 당신의 텃밭에서 온다
때로 우수에 잠겨 당신이 바라보던 무꽃에서 오고
비만 오면 쓰러져 운다면서
당신이 일으켜 세우던 해바라기에서 오고
내가 집을 떠날 때
당신의 눈이 던지던 슬픔의 그물에서 온다
당신은 날개를 준 것만이 아니라
채색된 날개를 주었다
더 아름답게 날 수 있도록
하지만 당신의 경사진 이마에
나는 아무것도 경작할 수 없다
삶이 파 놓은 깊은 이랑에
이미 허무의 작물이 자라고 있기에
―시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 숲,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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