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187 가을에 정한모
어렸을 적에
시집《여백(餘白)을 위한 서정》(1959) 수록 |
가을에
정한모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시집『여백(餘白)을 위한 서정』(1959)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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