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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나희덕 - 카톡 좋은 시 243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2. 1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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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 좋은 시 243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여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시집『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9)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여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시집『어두워진다는 것』(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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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

아,

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

꼭 그날이란 게 어디 있겠어요

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이 되는 것을요

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

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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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병 가자

 

   순례 


 
    한 선배는 죽고, 한 선배는 늙었다

 

    아프지 않은 세상으로 떠난 선배는 환하게 웃고 있고 늙은 선배는 가슴뼈 드러내며 울고 있다 몸이 곯아 먼저간 녀석도 아프고 그냥저냥 버티고 있는 놈들을 봐도 아프다, 늙어가는 선배를 경청한다 누군가 떠나고 나서야 우르르 상가에 모이는 신발들은 깃발 여행처럼 창백하다 생전의 밥 한 끼가 얼마나 참한 배웅인가

 

   조문은 너무 늦은 안부
   차가운 안부, 꽃그늘 어질어질한 봄밤을 견디고 있다

 

 

 

ㅡ제2시집『혹시나』(도서출판 삶창,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