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시 모음
우울한 샹송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비애(悲愛)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위에
애정(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지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ㅡ시집『우울한 샹송』(삼애사, 1969)
ㅡ이수익 시선집『불과 얼음의 콘서트』(다남,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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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산동 우체국
황규관
내가 너에게 편지 부치러 갈 때
한가한 우체국 입구에 나와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인사하던 우체국장 아저씨
꼭 나의 비밀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뚱뚱한 우체국 아가씨가 볼까봐
얼른 편지를 부치고,
그리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내 뜨거운 편지가
지구를 삼천댓 바퀴 돌다 도착했으면 싶었다
사랑한다는 구절에 세월의 곰팡이가 슨 채
이쁘게 늙은 너의 손주 손에 배달되어
노인대학 야유회 간 너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먼지가 더께로 낀 너의 창문을 기웃거리다
수취인 불명이 찍혀
바람이 내 무덤 앞 넓적바위에
일몰 직전 햇살처럼 쓸쓸히 반송해주길
나는 정말 얼마나 꿈꾸었던가
셔터가 내려진 철산3동 우체국
어둠 속에서 넋없이 바라보다 돌아선 날
내 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십억 광년쯤 떨어진 별에 들렀다 갈
편지를, 너에게 쓰기로 했다
ㅡ시집『철산동 우체국』(내일을여는책,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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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체국을 가며
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마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 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항공고 졸업 1991년 육군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시집『패배는 나의 힘』.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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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팔꽃 우체국
송찬호
요즈음 간절기라서 꽃의 집배가 좀 더디다
그래도 누구든 생일날 아침이면 꽃나팔 불어준다
어제는 여름 꽃 시리즈 우표가 새로 들어왔다
요즘 꽃들은 향기가 없어 주소 찾기 힘들다지만
너는 알지? 우리 꿀벌 통신들 언제나 부지런하다는 걸
혹시 너와 나 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서사는 죽지 않으리라 믿는다
미래로 우리를 태우고 갈 꽃마차는
끝없이 갈라져 나가다가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와 같은 나팔꽃 이야기일 테니까
올부터 우리는 그리운 옛 꽃씨를 모으는 중이다
보내는 주소는, 조그만 종이봉투 나팔꽃 사서함
우리 동네 꽃동네 나팔꽃 우체국
―시집『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사 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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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리운 우체국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등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는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 흔들리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시집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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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체국 계단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시집『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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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체국 앞 평상
손순미
길은 저 혼자 우체국으로 들어가 버렸고, 바람은 측백나무 겨드랑이를 부채질하다 기절해 버렸다 우체국 앞에는 한 토막의 평상이 놓여 있고 직원들은 편지를 쓰지 않는 인류의 앞날을 걱정하며 평상 위에 놓인 더위를 구경한다
한 남자가 평상을 향해 걸어온다 남자의 바지를 그대로 갈아입은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남자가 측백나무 쪽으로 평상을 옮기자 그림자는 황급히 배웅을 마치고 돌아간다 못난 남자에게서 태어난 불행한 껍데기는 가라! 노숙에 지친 남자가 겨우 헛소리를 삼키며 평상위에 눕는다 약지가 없는 남자의 손이 나뭇잎처럼 흔들린다 여름이이렇게 춥다니!
십자가를 짊어지듯 남자는 평상을 짊어지고 예수처럼 누워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부활을 꿈꾸지 않으며. 각도를 조금만 비틀면 폭염에 순교한 자로 기록될 광경이다
남자를 태운 평상은, 생각하면 눈물이 핑∼도는 모양이다
―월간『현대시학』(2011, 1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 시 100선』(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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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을 우체국
문정희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안도현 외 지음『소월시문학상작품집』(문학사상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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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우체국 앞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정윤천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억을 가진 사람과,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구라도 한 사람을 기다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의 인생의 무늬에는 어딘지 차이가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생이 바닥으로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 와서 깔리고, 모든 생의 그 그늘들은 다른 방식으로 스러지기도 할 것 같았다.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등에 대고서라도, 이제라도 '그'를 한번 기다리며 서 있어보라고, 가만히 말을 건네주고 싶었던 가을날이 있었다.
―시집『구석』(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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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을 우체국에서
정문규
지금까지 받은
사랑의 선물
다시 돌려드립니다
너무나 많이 받아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단풍잎 제 마음도
함께 부칩니다
그 동안 다정했던
봄과 여름도
고마웠습니다
답장은 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하얀 겨울로 가는
망각의 열차를 탔거든요
안-녕-히-계-세-요
―시집 『행복 체인점』(문학공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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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별정우체국
채상우
저건 강아지풀이고 저건 참나리고 그래 오늘도 안녕
십 년 전에도 그랬듯 작년처럼 저기엔
말냉이꽃이 피었더랬는데 애기별꽃은 이미 다 숨었고 개오동나무엔 다시
꽃이 피고 있구나 붉은괭이밥은 여전히 붉은괭이밥이고
장미를 심을까 내년엔 파란 장미를
내 발톱에서 곰팡이가 피어난다
ㅡ계간『시와 세계』(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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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다시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시집『뿔』(창비, 2002)
―『신경림 시전집 2)』(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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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낭송 김춘경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 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무렵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2』(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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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송에서 이어짐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바닷가 우체국/안도현-낭송 김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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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명자나무 우체국
송재학
올해도 어김없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속에 고요히 접힌 다섯 장의 붉은 태지(苔紙)도 여전하다
화두(花頭) 문자로 씌어진 편지를 읽으려면
예의 붉은별무늬병의 가시를 조심해야 하지만
장미과의 꽃나무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느리고 쉼없이 편지를 전해주는 건
역시 키작은 명자나무 우체국,
그 우체국장 아가씨의 단내 나는 입냄새와 함께
명자나무 꽃을 석삼년째 기다리노라면,
피돌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가미로 숨쉬니까
떨림과 수줍음이란 이렇듯 붉그스레한 투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자나무 앞 웅덩이에 낮달이 머물면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종종걸음은 우표를 찍어낸다
우체통이 반듯한 붉은색이듯
단층 우체국의 적벽돌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연금술을 믿으니까
명자나무 우체국의 장기 저축 상품을 사러간다
―시집『진흙 얼굴』(문예중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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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가을 우체국
이기철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통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시집『나무 나의 모국어』(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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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50』(조선일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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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가는 길
나영애
정다운 님체취가
녹아 있는 것 같은
우체국 가는 길
육차선 달리는 타이어노래
가로수는 차양 치고
쉬어가란다
페츄니아, 색색이빙그래 웃고
옷섶 안으로 든 살살이바람
긴 나무 의자 빼준다
안개 낀 듯 아득한 젖빛 허공
꿀비떨어질 것 같은
우체국 가는 길
밤낮 좋은 말 찾아 빚은
100여편 연서로 채운
나의고백한 권 들고
우체국 가는 이길
다시걸어보았으면
받아 읽을 사람 있었으면
ㅡ월간『우리詩』(201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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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가는 길
전다형
봉투의 주둥이를 입으로 훅 분다 추신으로 눈이 새까만 채송화 꽃씨를 함께 넣는다 만삭의 봉투가 뒤뚱, 봄 벚꽃길 열고 네거리 우체국 간다 나냐너녀 노뇨누뉴 왕벚꽃 말문 트는 돌담을 따라 시옷이응 지지배배 초등학교 담장을 지나 두근두근 사랑의 능선을 돌아 붉은 우체통 기다리는 소박한 우체국으로 들어선다
앉은뱅이저울이 벌떡 일어나 눈이 까만 채송화 꽃씨를 안아 올린다 그립다 사랑한다 씨알 굵은 고백은 아껴두고 사랑의 변죽만 울렸던가 꽃대궁에 올라앉은 잠자리가 부드러운 날개를 사뿐 접는다 날아가듯 저울 눈금이 요동친다 꽃씨가 꽃대의 거리를 재는지 발가락이 허공을 툭툭 찬다 발뼘을 잰다 봉함엽서 봉투의 솔기가 자꾸 터진다
휘파람새 한 마리 푸드덕 붉은 마음을 물고 날아간 그곳, 추신으로 넣은 채송화 꽃씨가 속닥속닥 꽃말을 터뜨린다 하얀 치아를 활짝 드러내고 깔깔 쏟아놓을 비단길, 중년의 아낙이 연초록 설레임을 펼쳐 읽는다 그곳에는 활짝! 만개한 주름들도 다 핀다
―웹진『시인광장』(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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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우체국
이영춘
너무 멀리 갔다
발자국이 지워진 너의 길
지상의 풀벌레도 어느 새 길을 잃고
밤새 목청 터지도록 너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계절을 끌고 가는 저 허공의 길
허공을 채우는 별 잎사귀들이
점점이 붉은 방점으로 너를 깨우는데
별 우체국,
너는 어느 유목민의 자손인가
아득히 소식이 멀다
그 먼 나라에 잠들었을 너에게
나는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쓴다
어느 별 우주 정거장에서 붉은 귀 세우고 있을까
별들이 소리 없이 우는 밤,
그 울음소리에 귀 묻고 앉아 눈 먼 편지를 쓴다
밥알처럼 한 스푼씩 떠 음미할 눈물을 쓴다
지상에는 네가 사랑하던 너의 꽃잎들 소식은 멀고
네가 등 기대고 눕던 붉은 탯줄도
너를 따라 그 나라에 든 지 오래다
지상은 텅 빈 정거장
붉은 꽃잎들 뚝뚝 떨어진 빈 집 뿐이다
네 혈흔처럼, 발자국처럼
나는 오늘 밤 아득한 그 나라에
별 우표를 붙인다
―계간『시인수첩』(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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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우체국
류인서
지구만한 분화구에 바닷물 모두 담아 졸인다면 바다는 사라지고 소금바위만 남을 테지. 그걸 한 방울 눈물이라 우기자.
거기 굴을 내며 소금을 캐던 이들이 있었다. 그이들의 끝나지 않은 노동이 삼천 개 방과 소금 샹들리에 빛나는 성당과 지하 우체국을 품은 소금동굴*이란 설이 있다.
내 눈물 속에도 미로 같은 갱도와 밀실과 붉은 우체통이 있다.
울보였던 어린 언니는 때 없이 눈물독을 채웠다. 그 눈물 볕에 말렸더니 일생의 밑간으로 쓸 만한 소금량. 오줌싸개 동생이 키 쓰고 얻어 모은 것 비길 바 아니었다.
언니의 잘 마른 눈물독에는 그때 만든 소금이 덩이덩이 달려있다. 나 그걸 얻어 소금 새를 조각한다.
마감 무렵 우체국에서 바다로 간 네게 엽서를 쓴다. 너는 눈썹처마 밑에 소금꽃 바다를, 일렁이는 화평선을 금줄처럼 걸어두었다. 소금나무를 잊고 나의 몸에 와 알을 낳는 새여.
*폴란드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을 빌려 씀
―엔솔로지『소금시집』(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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