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손택수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계간『시평』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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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박문혁
아버지가 다리미 하나 들고 세상 한 가운데 섰다. 비록 세상이 알 굵은 사포처럼 거칠다 해도 창가에서 응원가를 불러주는 벽돌만한 금성 라디오 벗 삼아 묵묵히 하루를 다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감은 손목을 아리도록 다림질을 강요했지만, 세상을 배우는 수업료라 여겨 한번 숙인 고개를 좀체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점점 달인이 되어가던 아버지.
아버지는 다리미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렸다. 장마 끝으로 축축해진 무등산 호랑이 가죽도 다리고, 학동과 지원동을 돌며 바다를 파는 목포댁의 생선 비린내도 다리고 매번 귀가 할 때마다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막노동꾼 김씨의 흘러간 노래도 다리고, 거리에서 붕어빵을 구워 파는 박씨의 희망도,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 송씨의 하얀 지팡이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연탄배달을 하는 대학생의 굵은 땀방울도 스팀을 다려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방암까지 다릴 수는 없었다.
이제 그 아버지가 3평 좁은 공간에서 홀로 늙어간다. 지금것 구겨지고 이맛살 찌푸린 것들, 매끈하게 다려 모두 손님에게 돌려주고 마지막 남은 것이라곤 고작 몸에 걸친 한 벌 외로움 뿐.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아버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리지 못한다. 늦은 밤 나는 아버지가 벗어놓은 외로움을 빳빳하게 다려서 어머니 영정 옆에 슬쩍 걸어놓는다.
미사일처럼 세워놓은 다리미가 어둠을 다림질하며 하늘로 솟아오를 듯.
―《2008 무등일보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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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유하
내가 사는 동네 세탁소 아가씨는
옷 수선을 아주 잘하죠
헐겁거나 꽉 조이는 바지들을
감쪽같은 맞춤복으로 고쳐놓지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음미하듯
나는 그 옷을 입어요
솔벤트 내음 가득한 세탁소에 가면
그녀는 하얀 치아를 살짝 보이며 말하곤 하죠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옷들에게
나는 많은 걸 배운답니다
그들에겐 새옷이 지닌 오만과 편견이 없지요
더러움의 끝에서 다시 순백의 빛을 보았으니까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그래요, 그녀의 세탁소에 갈 때면
난 그녀의 손길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꿈꾸어요
어둠의 끝에서 다시금 흰눈처럼 빛나는
옷들의 영혼을 꿈꾸어요
―시집『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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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진은영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 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의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 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 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 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 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렀지
엄밀한 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논문까지 써놓고
이제 와 기억하는 건
용수 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십 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 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 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갔을 그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뒀으면 벌써 네가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자식 나이 세듯
세워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 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 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의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놓을수록 자꾸만 살에 늘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단편집과 중론,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 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을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을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 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흰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월간『현대시』(2010,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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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세탁소
임동윤
그 여자의 세탁소는 계단 아래에 있다
가파른 계단을 머리에 인 스팀보일러가
종일 쉭쉭 단내를 토해내는 곳
드라이클리닝기계는 바람을 만들며 돌아가고
매연과 먼지 속을 떠돌다 온 옷들이
불끈 다리미를 쥔 여자의 손에서
대낮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날려보낸다
바짓단 자르며 바지런히 도르르 재봉틀을
돌리는 몸집 작은 여자, 앞가슴에 한껏
실밥을 묻힌 채 엉덩짝을 꿰매는 중이다
납작해진 다리미와 다리미판 사이,
구겨진 사람들이 누우면 더운 김에 훅훅 젖어
하얗게 일어서는 길들, 능숙한 여자의 손끝에서
풀잎처럼 팔랑대는 옷들, 먼 길 돌아온
생애까지 바람에 펄럭펄럭 나부끼고 있다
날마다 찰랑찰랑 물소리를 내는
그 여자의 세탁소는 늘 푸른 대나무 숲
얼굴 씻은 새들이 종일 와서 소리 울고
구겨진 마음들이 온통 제 속을 비우는,
여자는 마침내 푸른 물이 도는 숲으로 일어선다
너덜대는 내 삶도 저 옷처럼 잘라 기우면
모두 반듯하게 펴질 수가 있을까
스팀보일러가 단내를 뿜어대는 계단 아래서
헛짚어 떠돈 하루가 씽씽 씻겨 돌아가는 곳,
불끈, 다리미 고쳐 잡는 여자의 손에
축 쳐진 내 팔 다리도 벌써 움켜잡히고 있다
―시집『아가리』(문학의전당,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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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 지점의 세탁소
이길상
십 년 전에도 그들의 집은 세탁소였다
세탁소는 지루한 그림 속에 있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들
무기력한 일상이 옷 밑단 속에 햇살로 꿰매졌다
퇴근 후에도 뭔가를 찾는 사람들
그의 옆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신발장 속의 때늦은 포부가 하루하루 지친 그의 그림에 자주 올라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폐쇄된 회로 같았다
마음이 분주히 움직였으므로
정작 그리고 싶었던 게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림 속에 불어터진 시간만 쟁여졌다
너덜거리는 시선으로 달빛이 스몄다
빈 주머니에서 담배가 만져졌고
다림질만 해도 삶의 속도는 항상 제자리였다
찾아가질 않는 옷들이 있어 겨울이 왔다
아내는 입지 않을 옷들을 마구 사들였다
그녀는 가벼운 색 옷만으로도 환멸 덩어리가 되었다
자신을 이해한 순간 그와 아내는 벼랑의 끝
쇼핑 후 미친 듯한 과속으로 그녀는 죽었다
거리의 때절은 죄들, 세탁기에서 풀어질 때
난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그들이 꿈꾸는 세탁소는 다시 지루한 그림 속이리라
바람 없이도 시간을 허비하며 흔들이는 불꽃
램프 안 휘청이는 불꽃은 브레이크가 없다
―계간『문학청춘』(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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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투티 세탁소
강정애
숲의 경사면에서 바람이 팽팽해진다
붉은색 단추 같은 꽃들이 떨어지는 숲엔,
안감의 흰꽃들이 핀다.
먼 곳의 주름이 몰려오는 한낮
흑백이 천조각이 펄럭거린다.
안팎이 다른 구름을 펼쳐놓고 본을 뜨는 가위질 소리
덜 마른 구름의 조도가 낮아질 때
몇 방울 물소리가 떨어진다.
맑은 날엔 산의 꼭대기에 붉은 천이 펼쳐지기도 한다.
후투티새의 울음소리가
세? 탁탁 목청을 높이며 골목을 도는 목소리 같다.
후두두 후두두 숲을 밝고 달려오는 소나기
바람이 빠른 풍속으로 숲을 돌리면
원통 속 빨랫감처럼 숲은 물길이다.
일제히 날개를 펴는 나무들, 연초록 깃털에 매달린 수만 개의 鍾을 치고 숲을 빠져나가는 바람
잎사귀들은 무거운 시간을 견딘다.
상한 숲의 한 귀퉁이가 수선대 위에 올려진다.
붉거나 흰 단추들이 떨어진 자리마다
오려내고 봉합하는 메마른 바느질 소리.
녹색 겉감을 뒤집어 안과 밖을 바꿔 꿰맨
어둠의 거푸집을 뒤집어쓰고 나온 붉은 물결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깔깔한 조각천 몇 장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후투티 소리가 멀어지고 있다.
―시선집『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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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세탁소
이은심
어떤 아름다운 저녁에 나는 세탁소에 간다
세상의 더러움을 보다 못해 하느님이 차려놓은 세탁소에 하루 만에 더러워진 실크 블라우스
그 부패의 물증을 맡기러 간다
늘 공사 중인 골목 입구에서 몸이 스멀거리는 것은 파헤쳐진 양심 때문이다
선들바람에 슬쩍 곁을 주는 실루엣이나 속없는 통정에 살을 대고 하르르 피어나는 장미꽃 무늬나 곰곰 들여다보면 그게 다 감쪽같이 묻어버린 상처인데 새삼스레 높다한 횃대에서 건들거리며 속을 까발려 보이는 얼룩들
얼마 전 몸을 푼 주인 여자는 아기를 업고 골목을 서성인다
갓난아기의 얼굴엔 접힌 자국 하나 없고 주름이 두세 개 잘못 잡힌 내 바지는 시시각각 따로 노는 마음 탓이라는 걸 알겠다
여자는 고분고분 피어 있는 영산홍에 물을 주고
나는 철따라 꽃피운 죄악 한 벌을 맡긴다
작은 골목에 감추어 두어도
하느님의 세탁소는 점점 번성중이고
어떤 이가 달을 표백제에 담가 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는 저녁
여벌이 없는 사랑은 맡기지도 못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꿈 없는 잠을 잔다
―시집『오얏나무 아버지』(한국문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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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한혜영
공무원을 하던 동생이 그 짓을 때려치우고 태평양을 건너 뉴욕으로 이주, 세탁소 주인이 되어버린 뒤 일년 내내 태평양 주름살과 씨름을 하고 있다 눌러도 눌러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
태평양 그 시퍼런 치마폭 다려야할 물굽이는 첩첩이 밀려오고, 질 나쁜가루비누처럼 시원찮은 영어는 좀처럼 거품이 일지 않아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까?
니 맘 내 다 안다,
안다 하면서도 치마폭 솔기 하나 잡아주지 못하는 이 누나도 사실은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바다를 입은 채 십년 내내 미친것처럼 출렁거렸다 어차피 이쪽과 저쪽 끝에서 팽팽하게 잡아주지 못할 바에야, 동생아 바다는 구겨진 채로 펄럭일 수밖에 없으니
펄럭이게 내버려두거라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다리미 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바다가 있어 오히려 다행한 일 아니겠느냐 아니겠느냐 이런 소리를 내며 물결이 밀려온다는 거, 머지않아 듣게 될 것이니
고스란히 듣게 될 터이니
―시집『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천년의시작,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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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푸스 세탁소
최치언
이 마을 가장 높은 곳엔 세탁소가 있다.
바지단을 줄인 듯 껑충한 머리의 주인장은
지붕 위에서 함석을 키우고 있다.
코끼리 궁둥이만한 느린 구름쟁이
세탁소 지붕 위엔 도달할 쯤
주인장은 망치와 못을 들어 함석을 박는다.
망치가 한번씩 내려쳐질 때마다
미싱 밟는 아내의 머리 위로 실밥이 날린다.
누룽지 같은 곰보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수줍게 실밥을 털어낸다.
이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엔 올림푸스 세탁소가 있다.
종일 천둥처럼 망치를 내려치는 사내가 있고
때묻은 옷더미 속에서 바늘대로 꼿꼿이 말라가는
그의 여자가 있다.
오늘도 비는 내리지 않고
저녁 안개가 흰 빨래처럼 펄럭거릴 쯤
주인장은 지붕 위에서 내려온다.
풀어진 세제 속에 붉게 달아오른 두 손을 담그고
여자는 하루종일 바람을 맞은
그의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한다.
―시집『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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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에서
이상국
아끼던 골덴 재킷의 소매가 너무 닳았다
털이 빠지고 오래되긴 했으나
사실은 내가 왼손잡이어서 그렇다
다른 데는 다 멀쩡한데 하며
세탁소 여자는 뜨악하게
수선한들 별로 돈이 안된다는 표정이다
왼손이 불편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내가 왼손잡이여서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
불쌍해서 눈이 붓도록 울거나
언젠가 평양 만경대 갔다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안내원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누가 봤을까봐
아직도 꺼림칙해하는 정도다
그러나 요즘은 자식이 취직을 하거나
군대에 가게 되면 그 애비가
어느 손을 주고 쓰는지도 알아본다고 해서
나는 할 수 없이 좌우를 다 잘라달라고 했다
소매사 불구처럼 댕공했지만
아무도 눈여겨볼 것 같지는 않았다
―시집『뿔을 적시며』(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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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이은규
이토록 눈부신 날
나의 세탁소에 놀러오세요
무엇이든 표백 가능합니다
너무 투명하여 그림자조차 없는 문장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라는 당신의 문장에 기대어 한 절기
환절기 잘 견뎠습니다
네, 문장 덕분입니다
아무렴요 아무렴요
고집이라 쓰고
표백된 슬픔이라고 읽습니다
표백된 슬픔이라 쓰고
고집이라 읽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겨울
어떤 문장에 기대어 동절기
한 절기를 견뎌야 할지
막막하기만 먹먹하기만 합니다
문장 때문입니다, 네
아무렴요 아무렴요
아무래도 고된 날에는
일하기 싫어요, 라는 팻말을 걸고 문을 닫아요
나를 망치러온 구원자, 당신
모든 기억이 표백되는 겨울은 두 번째 생이다
눈부신 날 이토록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로 놀러오세요
무엇이든 표백 가능합니다
그림자조차 없는 문장, 너무 투명하여
―계간『시산맥』(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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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당선작]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김연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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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왜 세탁소를 할까? 지금은 그 생각뿐이다. 슈퍼마켓도 아니고 피자가게도 아니고 왜! 남이 입던 오염된 옷을 걷어다 빨래해 주는 일이냐고!
경태는 기어이 김치 국물 묻은 재킷을 벗으며 내게로 걸어왔다. “너희 아빠가 세탁물 걷으러 올 때까지 기다릴 거 뭐 있냐? 네가 가져가면 되지.” 경태가 재킷을 내 책상 위로 던지며 말했다.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종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을 만들었다. “지욱아, 아빠가 칭찬하시겠다. 학교에서 돈 벌어 온다고.” 경태의 쌍둥이 동생 경수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분노의 눈물을 참느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눈 대신 주먹이 울어 주고 있었다. 뱀 허물처럼 징그러워 보이는 재킷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경태와 경수는 내가 폭발하기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긴장했다. 그 기대를 만족시켜 주고 싶지 않아 조용히 교실을 나왔다. “야, 강지욱. 옷 가져가야지.” 경태의 말이 가시처럼 뒤통수를 찔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난주에는 경수가 옷에 일부러 물감을 묻히고는 빨아 오라며 벗어 줬었다. 그때는 그 옷을 경수 얼굴에 집어던지며 말다툼을 했다. 그래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 저 세트로 못된 형제들과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내 운이 좋아져서 싸움을 찾아 헤매는 쌍둥이가 전학 가게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작은형이 물려준, 유행이 지난 운동화를 신고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뒤축이 찢어졌다. 작은형은 신발을 구겨 신는 버릇이 있었다. 다행히 요즘은 고친 것 같지만. 슬리퍼가 되어 버린 운동화를 질질 끌며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조심혀야지. 안 다쳤남?” 고개 들어 보니 폐지가 가득 담긴 리어카를 세우며 할머니가 말했다. “안 다쳤어요. 죄송합니다.” 나와 부딪친 충격으로 리어카에서 떨어진 종이박스를 주워 올리며 대답했다. 좋은 신발은 주인을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데 내 신발은 폐지 더미로 안내하는구나. 그래도 내게는 희망이 있었다. 새 운동화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거실 책꽂이에 꽂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생각을 하니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신발 역할을 못하는 운동화를 신고서도 기록적인 속도로 집에 도착했다. 「지혁 세탁소」 부모님은 큰형 이름으로 세탁소 이름을 지었다. 세탁소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욱 세탁소였다면 어땠을까? 윽. 생각만으로도 공포였다. 큰형은 별 불만이 없나 보다. 하긴, 형 주위엔 세탁소집 아들을 사냥하는 쌍둥이가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빠가 양복바지를 다림질하고 있었다. 아빠의 등 뒤에서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휘발유 냄새를 풍기며 돌아가고 있었다. 천장엔 깨끗하게 세탁된 옷들이 이름표를 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그래. 오늘 하루 어땠어?” 아빠는 왕창 구겨진 바지를 마술처럼 펴면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다. “지난주와 똑같죠 뭐.” 이마를 잔뜩 구기며 얼버무렸다. 드라이클리닝 기계를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엄마의 재봉틀이 있다. 옆 선반에는 동네의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수선해야 하는 옷들이 쌓여 있다. 그 뒤에 보이는 조그만 쪽문을 열면 우리 집이 나온다. 현관에서 너덜너덜해진 운동화를 벗었다. 신발장에는 작은형이 신다 작아진 신발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양제를 주는지 작은형의 발은 머리카락처럼 자란다. 운동화에게 낡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헌 운동화들은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차지가 됐다. 그 덕에 난 새 운동화를 신었을 때의 그 산뜻한 느낌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내겐 희망이, 이럴 수가! 없다! 아침에 학교 갈 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없어졌다. 거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행복한 왕자가 사라졌다. 아니, 행복한 왕자가 가출을 하건 말건 그건 상관없다. 문제는 행복한 왕자가 품고 있던 돈이다. 엄마한테 새 운동화 사 달라고 조르다 지쳐서 포기하고 장장 6개월에 걸쳐 모은 돈이었다. 그 사이에 설날이 끼어 있지 않아 세뱃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액수였다. 그 피 같은 돈 오만 원을 그림책, 행복한 왕자에 꽂아 두었었다. 작은형과 같이 쓰는 방 안에 놓아두기 불안해서 고르고 골라 선택한 안전지대가 책장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큰형이 군대 간 뒤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아서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것이 아주 맘에 들었었다. 그런데 먼지와 함께 내 그림책들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큰형의 책들은 먼지를 벗고 본래의 색깔을 찾아 그 자리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엄마!” 가슴이 뛰고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침착해야 한다.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목욕탕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내 그림책 어디 있어요?” 엄마는 목욕탕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세탁기 대신 엄마가 밟아서 빨고 있는 것은 아침까지도 창틀에 매달려 있던 커튼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집이 대청소 중이라는 표시다. “쓰레기 버리는데 폐지 모으시는 할머니가 달라고 하셔서 드렸어.” “왜? 왜!” 도대체 왜 오늘이냐고! 오늘은 그저 새 운동화를 사는 역사적인 날이어야 했다. “네가 하도 험하게 읽어서 앞집 현서도 못 주겠더라.” 차라리 현서를 주지. 그럼 돈의 행방이라도 정확하게 알 수 있지. 퍼뜩, 아까 부딪힌 리어카 할머니가 떠올랐다. “엄마, 그 할머니 리어카 끌고 다니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돌아 현관으로 갔다. “금방 또 어디가? 엄마 청소하는 것 좀 도와주다 학원 가지.” “엄마는 왜 물어보지도 않고 남의 책을 함부로 버려요?” “어머머, 형들한테 물려받은 책 싫다고 새 책 사 달라고 떼쓴 게 어제다. 그리고 너 그 책들 안 본 지 오래잖아.” 돈을 모으는 동안 행복한 왕자를 얼마나 많이 들여다봤는데. 물론 아무도 없을 때 봤으니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새 책을 사 주고 버리든가요.” 투덜거리며 신발장에서 형이 물려준 다른 운동화를 꺼내 신고 나갔다. 그 할머니 걸음이면 아직 멀리 못 갔을 거다. 운동화가 너무 커서 자꾸 벗겨지는 게 문제지만 부지런히 뛰어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부딪힌 장소에서부터 물어보며 찾기 시작했지만 없었다. 이대로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나타났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할머니.” 신이 나서 달려갔지만 뭔가 이상했다. 리어카가 텅 비어 있었다. “할머니 리어카에 있던 것들 다 어쩌셨어요?” “너, 아까 부딪힌 아 맞쟈? 근디 리어카에 있던 걸 왜 묻는감?” 할머니는 무릎을 주무르며 물었다. “저기 삼거리에 있는 세탁소집에서 책 받아 가셨죠?” “응, 그런디?” “혹시, 행복한 왕자라는 책 펼쳐 보셨어요?” “안 봤는디.” 휴, 다행이다. “그 책들 어디 있어요?” “왜? 다른 종이박스들이랑 고물상헌티 팔었지.” “네?” 돈을 팔다니. “고물상이 어디예요?” “저짝 중핵교 지나서 쫌만 가면 되는디. 근디 왜 그러는감?”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안녕히 가세요.” 또 뛰기 시작했다. 행복한 왕자님, 제발 내 돈을 꽁꽁 감싸고 있기를…. 도착한 곳은 고철과 폐지와 헌 옷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저기를 일일이 뒤져야 할지도 모른다. 아, 꼬질꼬질한 내 인생. “안녕하세요?” 우선 어른들이 좋아하는 배꼽인사부터 했다. “무슨 일이니?” 폐지를 정리하고 있던 아줌마가 물었다. 내 돈아, 조금만 기다려라. 당장 폐지 더미에 달려들어 내 행복한 왕자를 찾아내고 싶었다. “리어카 끌고 오셔서 폐지 팔고 가신 할머니 아시죠?” “누구?” 아줌마는 폐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림책이랑 종이박스 팔고 가셨다는데.” “아, 그 할머니.” “그림책 중에 행복한 왕자 펼쳐 보셨어요?” “그거 볼 새가 어디 있어?” 다행이다. 견물생심이라 했으니까. “네. 그 할머니가 팔고 가신 그림책 어디 있어요?” “헌책방 할아버지가 사 가셨는데.” “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러니? 괜찮아?” 아줌마가 놀라서 뛰어와 날 일으켰다. “파신 지 얼마나 됐어요?” 마른입에서 내 목소리 같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한 15분쯤 됐나?” “그 헌책방이 어딘지 혹시 아세요?” “알지. 그런데 왜 그러니?” “엄마가 제게 묻지도 않고 그림책을 버리셨어요.” “그 찢어진 그림책이 네 거니? 여태껏 갖고 있던 것도 용하던데.” “저한텐 소중한 책이에요” “책을 참 좋아하는가 보구나. 너, 헌책방 골목 아니?” 아줌마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친절해졌다. “그런 데도 있어요?” “그럼, 쇼핑센터는 알아?” “네.” “그 뒤 골목에 헌책방들이 모여 있어. 그중에 재중 헌책방을 찾아 가.”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이제는 뛸 힘이 없다. 내 낡은 그림책이 이렇게 인기가 좋다니. 쇼핑센터를 지나다 사려고 봐 뒀던 운동화와 마주쳤다. 쇼윈도에 이마를 박고 한참을 바라봤다. 마지막 봤을 때보다 더 좋아 보였다. 운동화를 보니 힘이 솟았다. 기운을 차리고 도착한 헌책방 골목은 북적북적한 쇼핑센터와는 달리 조용했다. 크지 않은 간판들 중에서 재중 헌책방은 제일 작았다. 보이지가 않아 찾느라 고생했다. 드디어 찾은 헌책방 안에서 하얀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내 행복한 왕자 표지를 펼치고 있었다. 안 돼! “할아버지.” 아주 크게 소리 쳤다. “아이쿠 깜짝이야.” 할아버지가 놀라서 손을 휘저었다. 그 바람에 간신히 붙어 있던 행복한 왕자 표지가 쭉 찢어지며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더 찢어졌네.” 할아버지가 행복한 왕자를 다시 집어 들었다. “할아버지. 그거 제 책이에요. 돌려주세요.” 난 급한 마음에 떼를 썼다. “이 책이 네 거라고?” “네 제 거예요. 엄마가 제게 물어보지도 않고 버리셨어요. 근데 그걸 폐지 모으는 할머니께서 고물상에 파셨고 그걸 또 할아버지께서 사셨어요.” 할아버지는 떨어진 표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샀으니 내 거지.” “그럼 제가 다시 사겠어요.” 설마 오만원보다 비싸겠어? “왜?” “제게 너무도 소중한 책이에요.” “한 가지만 물어보자. 이 책들이 네가 함부로 다뤄서 찢어진 거니, 여러 번 읽어서 낡은 거니?” 할아버지가 좋아할 대답은 뻔했다. “여러 번 봐서 낡은 거예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돈이 모일수록 행복한 왕자를 더 자주 들여다봤으니까. “좋다. 네 책들을 돌려주마.” 할아버지는 책 더미 속에서 책들을 골라냈다. 그것은 깨끗해서 내 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제 책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 행복한 왕자만 있으면 돼요. “깨끗해졌지? 내가 수선 좀 했다. 니들 말로는 리폼이라고 하지.” 놀라웠다. 쓰레기 더미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어울렸을 내 책들이 말끔해졌다. “조금만 기다려. 저 책도 고쳐서 줄게” 할아버지는 행복한 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러나 할아버지는 행복한 왕자를 펼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돈 오만원이 무사히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돈을 옆에 내려놓고 책을 고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눈치챘다. 내가 책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돈을 찾아온 것을.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책을 다 고치고는 돈을 다시 행복한 왕자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자, 네 책이다. 가져가거라.” 낯설어진 책들을 차마 받아들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게 돈뿐이라면 돈만 꺼내 가도 좋아.” 나는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전 그냥 새 운동화가 갖고 싶었어요.” 할아버지는 내 운동화를 보고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마음이 놓이면서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직 쓸 만해 보이긴 하다만 너에겐 너무 크구나.” “형한테 물려받은 운동화예요. 딱 맞는 운동화가 아까 찢어졌어요.” “아저씨, 곰진 수학 문제집 있어요?” 옆 헌책방에서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었더라? 조심스럽게 옆 책방을 살폈다. “거기 찾아봐라.” “아저씨 영어 문제집은요?” 작은형이다. 나도 모르게 형이 날 보지 못하도록 몸을 숨겼다. 여긴 왜 왔지? 어제 엄마한테 영어랑 수학 문제집 산다고 돈 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건 딴 주머니 차기? 누구는 새 운동화 한번 사 보려고 했다가 이 고생을 하는데 누구는 새 책을 살 수도 있는데 헌책을 사? “엄마는 새 문제집 사는 줄 알 텐데.” 작은형이 미웠다. “야, 이 문제집은 딱 두 문제 풀고 말았네.” 작은형이 몹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와, 돈 굳었다. 이 돈으로 게임머니 사야지. 지호 넌 뭐 할 거야?” 작은형 친구가 물었다. “지욱이 줄 거야. 걔가 요즘 새 운동화 사려고 돈 모으는 중이거든. 그동안 내가 물려준 헌 운동화만 신었어.” 형이 내가 돈 모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비밀인데. “정말 싫겠다. 그런데 너, 이렇게 좋은 형이었냐?” 작은형 친구가 형을 놀렸다. “좋은 형은 아니지만 양심은 있는 형이다. 왜.” 작은형은 친구를 한 대 치고는 달려갔다. “얌마, 엄마 속이고 돈 빼돌리는 게 어느 나라 양심이냐?” 작은형 친구가 따라 뛰며 소리 질렀다. “난 엄마한테 새 문제집 산다고는 안 했다.” 작은형이 질세라 소리 질렀다. “저 학생 동생도 너처럼 물려받은 운동화를 신나 보다. 그래도 저런 형이 있어서 좋겠네. 그렇지?” 할아버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제 형이에요.”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허허허, 이놈아, 너랑 똑같이 생겼는데 내가 몰라볼 것 같으냐? 어디 가서 형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다. 어찌 그리 판박이일꼬.”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다. “형이 저렇게 절 생각해 주는 줄 몰랐어요.” “형 말을 들어 보니 넌 새 운동화를 신을 자격이 있구나. 지겨워졌다고, 유행이 지났다고 마구잡이로 버리는 세상에, 형이 물려준 신발을 신었다니 기특하다.” “그냥, 신발이 낡지를 않아서 엄마가….” 내가 받아야 할 칭찬이 아닌 것 같아 거북했다. 원해서 신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다. “착하구나. 네가 죽어 가는 신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준 거야.” 할아버지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생명?” “그래. 자, 네 책들 가져가라. 응급처치는 내가 했지만 살리는 건 네 몫이야.” 할아버지는 그림책들을 내 손에 올려 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비로소 애타게 찾아 헤맨 행복한 왕자를 품에 안았다. 오만원을 찾았다. 이제 새 운동화를 살 수 있다. 기뻤다. 그러나 오만원어치의 행복이 아니었다. 돈으로 사지 않고 얻은 그림책들 때문인가? 더 많은 만족감이 밀려왔다. “할아버지, 저는 수선도 못하는데 어떻게 살려요?” “그런 거 못해도 돼. 그 신발도 네가 고친 건 아니지? 그냥 신었을 뿐이잖니.” 할아버지는 또 다른 낡고 더러운 책을 수선하기 시작했다. 너무 쉬웠다. 신발은 신고 책은 읽는 것.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할아버지에게 방해가 될까봐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잘 가라.” 좁고 답답한 공간에서 할아버지는 편안해 보였다. 나는 헌책방 골목을 나와 쇼핑센터 앞에 도착했다. 쇼핑센터 안에는 새 물건들이 가득했다. 내가 찜한 운동화도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 아래서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어서 와서 나를 사 줘’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쳤다. 오늘은 사고 싶지 않았다.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전히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휘발유 냄새를 풍기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는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정리해서 천장에 매달고 있었다. 엄마는 재봉틀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배 안 고파? 어, 그림책 찾았네?” 엄마가 긴치마를 짧게 싹둑 자르며 물었다. 어제 뒷집 창경이 누나가 수선 맡기고 간 옷이었다. 저 치마는 이제 창경이 누나가 좋아하는 미니스커트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세탁소 안은 늘 이렇게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기운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내가 쌍둥이들과 어이없는 다툼을 하고 있는 동안. “네, 찾았어요.” 나는 그림책을 더 꼭 안으며 대답했다. “아까 지호가 와서 그림책 없어졌다고 찾고 난리 났었어. 너 오기 전에 찾아야 한다면서 뛰어나갔는데 안 오네.” 엄마가 재봉틀을 돌리며 말했다. 내일이 오면 행복한 왕자를 들고 현서에게 가야지. 그리고 아직 한글을 모르는 현서에게 읽어 줘야겠다. 지금은, 다리가 몹시 아프지만 지호형을 찾으러 가야겠다. <끝> ----------------------------------------------------------
2003 [경인 신춘문예 - 소설부문 당선작] 즐거운 세탁소 (기정옥)
즐거운 세탁소
대문을 연다. 거친 바람이 달려든다. 흙먼지가 날린다. 도시의 외곽지역인 이 곳은 산과 가까워서인지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거칠게 불어댄다. 문을 닫고 절뚝거리며 신작로를 걷는다. 신작로 옆의 논에는 벌써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군데군데 이미 벼를 베어 낸 곳도 있다. 참새들이 논바닥에 앉아서 종종대거나 벼이삭 위를 맴돌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와 깡통소리에 놀라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논 곳곳에 서 있는 허수아비들이 바람살에 몸을 뒤흔든다. 입고 있는 각양각색의 옷들도 바람에 펄럭인다. 간혹 허수아비의 머리나 어깨 위에 앉아 있는 깜찍한 참새들도 있다. 윗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목이 칼칼하다. 가래침을 돋우어 바닥에 뱉는다. 신작로를 빠져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비닐과 종이 조각들이 흙먼지와 함께 바람에 날린다. 저만치 버스가 오는 것이 보인다. 차가 정류장 앞에 선다. 나는 버스에 올라탄다. 바지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다. 셔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물쇠를 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주워서 옆구리에 끼고 셔터를 위로 밀어 올린다. 쇳소리를 내며 셔터가 밀려 올라간다. 출입문을 연다. 가지고 들어온 신문을 인체 프레스기 뒤편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건조한 바람이 유리문에 부딪치더니 맞은편 건물의 희망 컴퓨터대리점 쪽으로 내달린다. 재봉틀 위에 신문지 반 장만 한 햇빛이 창백한 얼굴로 떠 있다. 실내엔 솔벤트 냄새가 배여 있다. 뒷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출입문도 열어 놓는다. 통유리 앞에 줄줄이 서 있는 선인장 화분들을 마른 바람이 와서 핥고 간다. 아내도 저 선인장 화분들처럼 어딘가에서 날마다 흙먼지를 한 움큼씩 삼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제 저녁 무렵에 미처 다 하지 못한 아이롱을 끝마쳐야 한다. 나는 인체 프레스기에 전원을 넣는다. 벗어놓은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인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보일러 쪽으로 걸어간다. 옷걸이에서 고동색 양복 상의를 벗겨 프레스기에 걸친다. 스팀이 나온다. 곧이어 바람이 나오기 시작하고 프레스기 위에서 구겨졌던 양복이 서서히 팽창한다. 담배연기를 다시 한번 빨아들인다. 한 손으로 양복 상의를 벗겨낸다. 벗겨낸 상의를 배큠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흰색 와이셔츠를 다시 프레스기에 걸친다. 와이셔츠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담뱃불을 재떨이에 눌러서 끈다. 희망 컴퓨터대리점의 김 사장 와이셔츠다. 종종 이 곳에 맡길 적마다 홀아비인 그의 누렇게 뜬 얼굴처럼 셔츠도 군데군데가 싯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그만 다른 것으로 사입으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는 꼭 이 옷을 고집해서 입곤 했다. 오래 전에 그가 커피를 마시면서 생일날 아내가 선물로 사주었다고, 아주 비싼 거라고 자랑했던 바로 그 셔츠다. 조금 더 입어도 돼. 아직 입을 만해… 이 사람아. 형광증백제를 사용해서 형광처리를 한 것도 지금이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의 낡고 누렇게 변색된 와이셔츠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그의 퇴색해버린 인생도 덩달아 팽창한다. 인체 프레스기에서 구겨지고 변색해버린 그의 과거가 다림질되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과거를 벗겨 배큠 테이블 위에 놓고 미처 다림질이 덜 된 부분을 다린다. 김 사장은 한창 사업이 잘 되던 이 년 전 아내와 아이들을 호주로 이민 보냈다. 그는 컴퓨터를 열심히 팔았고 올 초에 대리점을 정리하고 아주 그 곳으로 이민을 가려고 계획했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여자였다. 그녀는 이민 2세와 바람이 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김 사장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몹시 괴로워했다. 그러더니 그 동안 비싼 비행기 값 때문에 딱 한 번밖에 나가지 않았던 호주를 어느 날 갑자기 컴퓨터 속에 새로운 아이콘을 만들듯 순식간에 다녀오더니 그 후에는 그 곳을 한번도 클릭하지 않고 있다. 이혼해달라는 아내의 애원도 뿌리치고 별거를 하고 있는 그는 지금도 아내를 잊지 못하고 있다. 나도 아직껏 아내를 기다리고 있다. 처음엔 아내를 많이 원망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애써 잊어버리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자식들의 엄마이고 돌이켜보면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다. 아내도 나에게 이민을 가자고 했다. 아이들은 오뉴월 논의 벼포기처럼 마구 커 가는데 놀이공원 한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며 툴툴거렸다. 아이들의 교육을 제대로 시킨다는 것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늘어가는 거품 투성이 사교육비 때문에 힘든 일이라고 했다. 난, 어릴 적부터 아이들 손잡고 놀이공원에 다니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버지를 가진 애가 제일 부러웠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번 달아나버린 시간들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거지…. 아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투정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 즈음의 난 한창 교육기자재 사업 때문에 고전을 하고 있었다. 넉넉한 형편으로 개업한 것도 아니었고 자금의 흐름도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한 사립학교의 기자재를 입찰할 때 가격을 잘못 상정하는 바람에 많은 손해를 보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납품을 해야했다. 그때 아내가 바라던 대로 사업을 정리하고 이민을 떠났더라면,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내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을까. 나는 몹시 잘 나가던 회사에 재투자할 공금을 어느날 밤 포커판에서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나중에야 몹시 후회하듯 가끔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본다. 김 사장이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걸어 오는 것이 유리문을 통해 보인다. 그는 아침마다 커피 두 잔을 자신의 가게 앞에 서 있는 자판기에서 빼서 가져오곤 한다. 김 사장이 열려 있는 문으로 들어온다. 나는 웃으며 종이컵을 받아들고 탁자 쪽을 가리키며 앉으라고 한다. 그가 의자에 앉고 나는 프레스기 전원을 끈다. 김 사장은 의자에 앉으며 재봉틀 옆에 차곡차곡 올려진 수선물들을 보며 혀를 찬다. “쯧쯧… 이 사람아! 이젠 그만 수선을 제대로 할 사람을 찾아봐…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재봉질이나 제대로 돼? 그래도 저렇게 해내는 걸 보면 정말로 용하지, 용해….” 그는 내 다리를 건너다보며 혀를 찬다. 나는 빙그레 웃고는 몸을 기우뚱거리며 몇 발짝 걸어서 그의 맞은편 의자에 가 앉는다. 다리가 불편해서 수선은 조금씩 천천히 하고 급한 것은 전문적으로 하는 곳에 의뢰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저 재봉틀 앞에 아내를 앉히고 싶다. 잘나고 좋은 자리도 아니고, 몸이 약했던 아내는 몹시 힘들어하겠지만 다시 함께 시작하고 싶다. 정말, 그녀만 돌아온다면 열심히 살고 싶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쓰다. 종이컵을 내려놓는다. 김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매일 하다시피 하는 말을 마치 녹음기의 테이프를 돌리듯 또다시 반복한다. “김 사장이나 제발 그 안대 좀 벗어버려요. 이젠 그만 벗을 때도 됐지 않나? 공기가 통해야지 염증도 빨리 낫는다구요. 언제까지 그걸 눈에 대고 다니려고 그래요? 가뜩이나 경기도 좋지 않아 힘이 드는데 눈병인 줄로 오해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도 안 들어오겠어요.” 김 사장은 머쓱해 하며 종이컵을 내려놓고 건너편의 스타 미용실과 희망 컴퓨터대리점 쪽을 힐끔 쳐다본다. 그리고는 항상 그렇듯이 안대를 한번 퉁겼다 놓으며 말한다. “미스 지와 김 기사가 있는데, 뭘… 어제도 안과에 다녀왔는데 아직까지도 염증기가 조금 남아있다는구만. 내참, 뭐 하는 수 없지.” 어찌된 일인지 김 사장의 눈은 호주에 다녀온 후에 발병해서 아직까지 깔끔하게 낫지 않고 있다. 안대를 떼어내버려야 빨리 낫는다고 얘기를 할 때면, “세상을 반쪽만 믿으라는 팔잔가봐…”라고 중얼거리면서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그는 항상 안대를 하고 다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종이컵을 감싸쥔다. 커피 맛은 여전히 씁쓸하다. 김 사장이 한마디 한다. “아니, 커피 맛이 왜 이리 써? 이 사람들이 설탕을 넣지 않고 간 거 아냐? 자판기 관리를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쯔쯧….” 나는 커피가 쓴 것이 아니라 김 사장의 지나가 버린 어제가 이제는 더 이상 달콤하지 않은 것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묵묵히 종이컵만 내려다본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니까 컵 밑바닥에 녹다 만 설탕들이 엉겨있다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김 사장이나 나는 저 녹다 만 설탕 같은 내일들을 기다리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세월에 안대를 해주고 다림질을 해대며. 김 사장이 나가자마자 키가 작고 통통한 남자가 들어온다. 주공 빌라 1동 301호에 사는 남자다. 그의 아내는 우리 세탁소의 단골이다. 여자와 함께 슈퍼에서 산 식료품과 과일을 들고 가던 남자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가게 문을 열고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단골인데 요사이 그녀는 보이지 않고 덩달아 드라이클리닝하는 그의 양복도 줄어들었다. 남자가 이렇게 세탁물을 가져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저 번에는 회색 면바지의 바지길이를 줄이러 왔었다. 처음 보는 면바지였다. 그는 검정색 면바지의 허리를 잡고 “이 바짓단 좀 줄여주실라요잉. 거기 접어둔 데 까장 줄이면 될 것이요잉…” 한다. 남자의 심한 사투리에 그의 아내의 세련된 서울 말씨가 생각난다. 행방이 궁금하다. “사모님께선 어디 가셨나요?”라며 운을 떼 본다. “아, 우리 마누라요?… 담배 있으믄 한 대만 줘 볼라요.” 남자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한숨을 쉰다. “사실은 요번에 지가 허던 사업이 잘못되부러서 그만두게 되어부렀네요. 건축 일이라는 거시 점점 사양길이 돼부렀잖소. 아이들까장 시골 엄니헌티 맡겨불고 집사람이 보험회사에 나가고 있잖소, 시방…” 한다. “예, 보험회사요.”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 남자는 다시 한번 담배를 빨아대더니 “…근디, 예나 지금이나 여자가 밖으로 나댕기면 집안 꼴이 안되등만요. 허, 참…”하며 뒤통수를 긁적인다. 나는 웃으며 바지길이를 가늠해본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밖으로 나간다. 재봉틀 앞에 앉는다. 윗실을 검정색으로 바꾼다. 전원 스위치를 넣는다.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남자의 바지에 초크로 표시를 한다. 사람들은 유난히 길거나 폭이 맞지 않는 바지 같은 현실에 맞춰서 자신을 재단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초크로 표시한 부분을 가위로 잘라낸다. 잘라낸 바지 길이 만큼이나 그의 희망도 줄어들었을 것만 같다. 어쩌면 그의 잘려 나간 바지 길이 만큼이나 그의 아내의 소망도 조금씩 잘려나가고 있을는지 모른다. 그의 재단되어버린 현실을 재봉틀의 노루발 밑에 끼워 위치를 잡는다. 나는 짧아져버린 그의 소망을 왼쪽 손바닥으로 고정시키고 천천히 재봉틀의 발판을 밟기 시작한다. 아이롱을 얼추 끝내놓고 배큠 테이블 옆에 놓여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는다. 소방도로 건너편 금양상가 옆엔 주공빌라 다섯 동이 줄지어 서 있다. 빌라들의 옥상 위에 놓여있는 노란색 물탱크가 선명한 색상을 뿜어내고 있다. 드라이 클리닝 기계 만한 물탱크들 사이사이로 오랜만에 새파랗게 높은 하늘이 각진 얼굴을 내밀고 있다. 군데군데 떠 있는 연한 회색구름을 휘저어 놓으며 새들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바람이 다소 잠잠해진 거리를 느린 걸음걸이로 걷고 있다. 아이롱을 하다가 불편한 다리 때문에 힘들어질 때면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유리문을 통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렇게 무연히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이따금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들이 걸어다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만들어진 허수아비가 아닐까. 추수가 끝나버린 황량한 논에서, 거친 비바람에 몸을 뒤흔드는 허수아비. 통유리를 바투 대고 빨간색 스커트를 입은 허수아비가 지나가고 흰색 면바지를 입은 허수아비가 지나간다. 건너편 보도블록엔 검정색 모바지를 입은 허수아비가 분홍색 투피스를 입은 허수아비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검정색 모바지는 폭이 몹시 넓어 보인다. 바짓가랑이가 바람에 나풀댄다. 저 허수아비는 이 도시가 무척 답답한가 보다. 그래서 갑갑증이 나는, 꽉 끼는 쫄쫄이 바지 같은 현실을 넉넉한 폭으로 재단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모바지는 드라이클리닝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옷감이 줄어들고 상해버리고 만다. 저 분홍빛 투피스는 100% 순면이 아니다. 혼방직물이다. 아마도 순면 50%와 폴리에스테르 50%의 혼방직물일 것이다. 사람들은 거의가 100% 순면보다 혼방직물을 더 좋아한다. 관리하기 쉽고 편안하며 구김이 잘 가지 않는 혼방직물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들은 혼방직물처럼 입기 편안하고 구김살이 가지 않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종종 사람들의 삶도 옷감 같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직조된 폴리에스테르나 순면이나 순모 같은 옷감. 그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들을 걸치고 살아가는 허수아비들… 깡마른 몸피에 걸쳐져 있는 그들의 닳아지고 낡아가는 드라이클리닝 같은 삶, 물빨래 같은 삶. 사람들은 마음속에 세탁소를 하나씩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이따금씩 이 곳에 들러 자신들의 지나버린 시간과 추억들을 드라이클리닝하거나 물빨래를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양복 한 벌이나 투피스나 원피스 따위를 보면서 나와 아내는 어떤 옷감 같은 인생일까 문득문득 생각해보곤 한다. 긴 생머리의 여자가 출입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선인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처음 보는 여자는 아니다. 낯이 익다. 한 달 전부터 가게 앞에 줄줄이 서 있는 선인장 화분들을 길을 가다가 멈춰 서서 내려다보던 바로 그 여자다. 여자는 흰색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었다. 한참동안 넋 나간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가시들이 돋아있는 몸통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빤다. 가시에 찔린 모양이다. 절룩거리며 뛰어나가 여자의 입 속에 있는 손가락을 낚아채서 얼마나 많이 찔렸나 확인해 보고 싶다. 여자의 여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펴보고 깊숙이 박혀 있는 뾰족한 가시들을 단번에 뽑아 내버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다.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왼쪽 팔뚝엔 원피스가 걸쳐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자는 머뭇거리며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려고요. 건너편의 주공빌라로 이사를 왔어요”라고 말하며 옷을 배큠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나는 “예”라고 응대하며 옷을 보일러 옆 스테인리스 봉에 걸쳐놓는다. 드라이클리닝 할 옷들을 이 곳에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한다. 여자가 입고 있는 흰색의 스웨터 같은 하얀색 이를 드러내며 잠깐 웃었던가. 나는 “아까 가시에 찔린 곳은 어떠십니까, 괜찮으세요?”라고 물으며 여자의 얼굴을 살펴본다. 여자의 얼굴이 너무 환해 나는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괜찮다고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한다. “선인장의 가시를 아주 좋아하죠. 전 저 가시를 하나씩 제 피부 속에 심고 싶어요….” 얼굴을 돌려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갑자기 형광등이 깜박거린다. 램프를 갈아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깜박거리는 형광등 때문일까. 여자의 얼굴은 더 이상 환하지 않다. 눈 밑의 실밥 같은 주름과 검은 주근깨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다시 형광등이 깜박거린다. “전, 아주 날카로운 가시로 만든 갑옷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간다. 나는 사다놓았던 형광등 램프를 어디에 두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잠시 멍하니 서 있는다. 아내는 신혼 초부터 내가 귀가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사업 초기에도 힘들게 영업을 해야 하는 나를 기다리며 온 집안의 불을 다 켜놓았다. 그건 아내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아내는 어릴 적 집에서 혼자 엄마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다. 미리 자라고 아무리 얘길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한달이면 보름이 넘게 밤을 꼬박 세우고 들어오는 당신 때문에 우리 집의 형광램프는 다른 집보다 훨씬 더 자주 갈아주어야 해. 아내는 식탁의자 위에 올라서서 형광램프를 갈아 끼우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아이들이 생기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무남독녀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내는 혼자 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너무 좋아해서 죽고 못살아하는 성격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다만, 이따금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소연을 하기는 했다. 병원에 가보라고 하면 별거 아니라고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생기자 하나하나 챙겨 주고 보살펴주는 것을 버거워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을 힘들어했고 아이들에게 매를 자주 드는 것 같았다. 그 날 백색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실핏줄이 터진 빨간 눈으로 노려보던 아내…. 그때 나는 들고 있던 선인장 화분을 스르르 놓쳐버렸다. 문이 열리고 건너편의 희망 컴퓨터대리점과 붙어있는 스타 미용실 원장이 들어온다. 그녀는 이 동네의 터줏대감이다. 입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쉴새없이 말을 하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뭘 먹어댄다. 주공슈퍼로 담배를 사러 갔다가 주전부리를 잔뜩 사들고 나오는 여자를 자주 보았다. 저 여자의 입에선 머리를 자른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아내의 가출이 튀어나왔다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가 손님들의 긴 머리를 자르고 퍼머넌트를 하거나 컷을 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소문도 그렇게 부풀어오르고 잘려 나갔을 것이다. 아마 나에 대한 소문도 아내의 얘기와 더불어 손님들의 머리에 중화제처럼 발렸다가 샴푸와 함께 수돗물에 씻겨나갔을 것이다. 그 잘나가던 회사 사장님이 한순간에 부도를 내고 세탁소를 차렸다고, 거기에다가 다리까지 다쳐 병신이 되었다고. 건물 주인 오 씨는 월세를 받으러 올 때마다 저 여자가 과부니까 한 번 잘해보라고 말한다. 그는 노골적으로 음흉한 얼굴을 드러내며 건너편의 미용실을 건너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밖에 모르는 것이지, 암…”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떠난 여자는 뭣땜시 기다리나. 여자가 한 둘 인가, 이 사람아! 이 골목엔 정말 홀아비 지천이라니까.” 그는 침까지 튀겼다. 정말이지 누구보다 먼저 홀아비가 되고 싶은 사람은 주인 남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목을 빼고 기다리는 것은 항상 더디 오게 마련인가 보다. 주인 여자는 오 씨보다 훨씬 젊고 건강해 보였다. 나는 동일 스포츠센터의 셔틀버스에서 어깨에 운동가방을 걸치고 내리는 그 여자를 자주 보았다. “홍 사장님! 저번에 맡겨놓은 투피스 좀 주세요.” 저 여자는 나를 부를 때면 꼭 `사장'이란 말을 넣는다. 오늘도 여자는 미용실의 간판처럼 옷을 정말 스타처럼 입었다. 패션모델 뺨친다. 얼마 전 그 일이 있고 나서 이따금 길에서 스치곤 했을 때도 서로 머쓱한 표정이었는데 이젠 많이 밝아진 얼굴이다. “예…. 잠깐만 기다려요.” 여자가 맡겼던 옷 한 벌을 생각해낸다. 그녀는 그 투피스를 입고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었다. 적당히 술에 취한 음성으로 미용실이 정기 휴일이니까 하루만 세탁소 문을 닫으면 안되느냐고 전화를 했다.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평상시의 그녀는 누구나가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약속 장소는 근처의 호프타운이었다. 여자가 생맥주 2천cc를 시켰다. 술에 알맞게 취해있던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자꾸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나에게 술을 권하기도 하고 따라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술잔에 손이 갔다. 나는 급작스레 취해가는 여자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너무 늦었으니 그만 일어서자고 했다. 여자는 일언반구도 없이 마른 오징어 같은 얼굴로 혼자 술잔을 비우기 시작하더니 또 다시 생맥주 2천cc를 시켰다. 그리고는 반이 넘게 마셔버렸다. 보다못한 내가 그만 가봐야한다고 벌떡 일어섰더니 비틀비틀 따라일어서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취한 여자는 내 등에 업혀있는 것도 몰랐다. 다리가 불편해서 너무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탔다. 미용실 앞에서 내려 여자의 핸드백을 뒤져 열쇠를 찾아냈다. 아무거나 맞춰보다가 세번째 열쇠가 맞아 겨우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눈이 신경쓰였지만 다행히도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여자가 기거하는 듯한 방문을 열었다. 혼자 사는 여자의 방에서는 그런 냄새가 난다는 것을 나는 그때 확실하게 알았다. 향기라고나 할까, 아니 체취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갑자기 정신이 까무룩해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맡아본 여자냄새였다. 여자의 방은 아담했다. 좁은 방인데도 있을 건 다 있었다. 다섯자나 될 듯한 장롱 옆에 하얀색 화장대까지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놓고 소파에 축 늘어져있는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여자는 전혀 일어설 기미가 없었다. 그냥 놔두고 가버릴까 하다가 밤기온이 너무 차다는 생각에 여자를 다시 끙끙거리며 업어서 방에다 눕혔다. 발을 돌리는데 거짓말처럼 여자가 나를 불렀다. 홍, 사장님….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짓말처럼 여자는 눈을 반짝 뜨더니 느린 몸짓으로 일어나 앉았다. 여자에게서는 술냄새가 났다. 나는 뒤통수를 새총으로 한 방 맞은 듯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약간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딸꾹질을 심하게 해댔다. 딸꾹… 딸꾹… 딸꾹질 소리와 함께 여자가 앞으로 푹, 고꾸라지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우리 둘이서… 딸꾹… 자알, 해봐요… 딸꾹… 그렇게 기다린다고 당신… 아내가 올 것 같아요? 흐흥, 바보같은 남자… 이리와봐요.” 비틀거리며 여자가 일어섰다. 어느덧 여자의 딸꾹질은 멈춰 있었다. 술냄새를 풍기며 여자가 나에게로 쓰러지는가 싶더니 붉은색 루즈가 묻은 입술을 내 입 언저리에 비벼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처음엔 당황했지만 나도 모르게 여자의 더운 입김에 기분이 몽롱해졌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순간, 여자가 내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등 뒤의 바지춤에 슬며시 손을 댔다. 여자가 뜨거운 숨을 다급하게 내쉬며 내 손을 가져다가 자신의 블라우스 속으로 밀어넣었다. 여자의 가슴이 위 아래로 심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내 바짓속의 남성도 격하게 성을 내었다. 나는 그런 자신이 몹시 못마땅했다.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여자를 확 떠다밀어 버렸다. 여자는 엉거주춤하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돌아서는 나의 등 뒤로 화장품 용기들과 함께 여자의 욕지거리가 날아왔다. 자세히 생각나지 않지만 전혀 스타답지 않은 욕인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여자도 나처럼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과거를 열듯 천장에 매달린 터널식 비닐 옷장의 자크를 연다. 스테인리스 봉에는 무수히 많은 옷걸이들이 비닐커버 안에 옷을 넣은 채로 걸려 있다. 우리는 옷걸이에 매달려 있는 저 양복 한 벌이나 원피스가 아닐까. 허수아비들은 현실이라는 저 옷걸이에 매달려 서로의 등허리를 바라보며 외롭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라는 옷장 안에 갇혀 고통과 같은 비닐커버를 뒤집어쓴 채로. 붉은 색 투피스를 내려서 스타에게 건네준다. 술과 구토물로 범벅이 되어 여러 군데 전처리를 하고 드라이클리닝을 했던 옷이다. 적당히 살집이 붙은 엉덩이를 패션모델처럼 흔들며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자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아마 저 여자는 나에 대한 마음의 길도 횡단보도를 건너듯 건너가버렸을 것이다. 모델같이 아름답고 마술의 손을 가진 스타에게도 세탁소는 필요한 모양이다. 그녀는 나에 대한 추억을 드라이클리닝 해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상과 현실을 바꿔치기라도 하듯 시시때때로 옷을 사고 갈아입는다. 그리고는 세탁소에 바꿔 입은 옷들을 맡기러 온다. 그들은 양복 한 벌이나 투피스나 실크 블라우스 따위를 맡기면서 자신들의 때 묻고 구겨져버린 이상과 여기저기가 얼룩지고 실밥이 터져버린 현실까지도 맡기고 싶은 것이다. 쉴새 없이 부풀어오르는 욕망처럼 너무 풍성한 옆구리를 줄여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옷의 여러 군데에 요란하게 매달려 있는 프릴같은 허영심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내 달라고 한다. 터널식 천장용 옷장에서 아내의 원피스를 꺼내서 비닐커버를 벗긴다. 그냥 옷걸이에 걸어두기만 했는데도 옷은 변색되어 누르스름하다. 혹시, 아내의 삶도 이렇게 누릿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현듯 조바심이 인다. 원피스를 옷걸이에서 벗겨 클리닝 기계 옆에 쌓아놓은 옷들 위에 올려놓는다. 모아진 옷들을 배큠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처리할 옷들을 고른다. 심하게 얼룩이 묻어있는 부분에는 카본을 스폰지에 묻혀서 살살 닦아주어야 한다. 회색 양복바지 무릎 부근에 커피색깔 같은 혈흔이 묻어 있다. 먼저 과산화수소 0.3%로 닦아낸다. 간혹 황갈색이 남아있을 때는 철분이므로 수산으로 처리한 다음 충분히 헹구어 내야만 한다. 베이지색 바바리 코트 군데군데에 곰팡이가 피어 있다. 분무기로 곰팡이 핀 곳에 물을 충분히 뿌려 둔다. 그런 후에 과망간산을 발라놓는다. 십분가량 지나면 환원제인 옥살산으로 발라놓은 과망간산을 제거한다. 의자에 앉아서 남자 한복의 마고자 단추를 은박지로 싼다. 양복 상의에 매달려 있는 고급 단추도 은박지로 싼다. 옷도 색깔별로 구분한다. 연한 색깔의 옷부터 클리닝을 해야만 한다. 옷을 구분해 놓고 드라이 클리닝의 준비공정을 한다. 마지막 단계다. 용제를 순환시켜 투명하게 보이는 사이드 글라스를 한 번 쳐다본다. 카본에 솔벤트를 첨가하여 진흙상태로 된 것을 투입구에 투입한다. 클리닝 기계의 문을 연다. 골라놓은 옷들을 그러모아 통 속에 밀어 넣는다.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잠근다. 다이얼을 돌린다. 클리닝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내를 정신없이 찾아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건너편에 제과점이 보였다. 유리문으로 따뜻한 주황색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내와 무척 흡사한 여자가 빵을 고르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본 순간 내 가슴도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부풀어올랐다.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급한 마음에 앞으로 내달렸다. 그 순간, 부아앙 소리와 함께 뭔가가 왼쪽 허벅다리를 세차게 치받았다. 오토바이였다. 나는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넘어진 왼쪽 무릎 위에서 다시 오토바이가 헛바퀴를 몇번 돌리다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고개를 외로 꼬고 뒤틀려버린 무릎을 부여잡았다. 잇새로 통증을 깨물고 있는 사이 오토바이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흐릿한 시야로 여자가 제과점 문을 밀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가 내 눈앞에서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듯이 오토바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수없이 많은 까만 밤들…. 거실에 불을 켜놓은 채로 사라져버린 아내와 오토바이를 뒤따라갔다. 꿈의 마지막엔 어김없이 오토바이의 바퀴가 내 가슴 위를 몇 바퀴 돌다가 돌연 사라져 버렸다. 다리를 절룩대면서 할만한 직업은 드물었다. 자금이 넉넉지 않아서 어렵게 끌고 가던 사업이었지만 그래도 왕년에 사장 행세를 했던 나였는지라 재활의지가 빈약했다. 순식간에 드라이클리닝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물빨래 같은 삶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낮술에 취해서 자다가 깨어나던 어느 날 오후, 신문지 사이에서 떨어진 일간지 귀퉁이에는 고용촉진 운운하는 담뱃갑 만한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곧장 세탁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처음엔 자존심도 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달라져 갔다. 클리닝이 끝났다. 기계의 문을 연다. 지독한 솔벤저 냄새가 확 달려든다. 이따금 나는 아내에게 이 솔벤저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에게도 아내는 이 솔벤저 같기만 하다. 세탁을 해주지만 독한 냄새와 잔류물을 세탁물에 남겨놓는 이 솔벤저처럼 아내는 자꾸만 과거의 나를 세탁해주고 그럴 때마다 지독한 그리움을 남긴다. 옷들을 꺼낸다. 바큠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옷걸이에 하나씩 걸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남학생의 체크무늬 교복바지를 집게 옷걸이에 걸친 후 밖으로 나온다. 고개를 쳐들고 옷걸이들을 통유리와 셔터 사이에 매달려 있는 줄에 건다. 솔벤트 냄새에 젖어 구겨져 있던 옷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전화벨이 울린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전화가 올 때면 항상 마음이 조급해진다. 서두르는 몸짓으로 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든다. “예, 즐거운 세탁솝니다.” 갈라지고 누가 들어도 전혀 즐겁게 느껴지지 않을 내 목소리 속으로 여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뛰어든다. “오빠! 큰일 났어. 윤이가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대. 담임 선생님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어.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 어이구, 이젠 나도 몰라! 박 서방 눈치보여서 죽겠어. 윤이는 오빠가 데려가!….” 여동생의 성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튀어나와 빨래방망이처럼 아들녀석과 나를 마구 두들긴다. “…그래. 알았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문다. 날이 갈수록 느는 건 담배와 아들녀석에 대한 걱정이다. 그 녀석이 집에 다니러 온 날 새벽녘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나에게 들켰던 일을 생각하면 담배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지건만 어찌된 건지 되레 늘어만 간다. 초등학교 오학년 녀석이 담배를 피우다니 뒤로 넘어갈 일이다. 녀석은 또 보나마나 장모님 댁에 갔을 것이다. 여동생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처음엔 내가 둘 다 키우다가 나중엔 장모님이 키웠는데 밤이 늦도록 비닐하우스의 꽃을 돌보는 일 때문에 아이들끼리만 자는 날이 많아져서 하는 수 없이 동생이 맡아 키우고 있다. 그 녀석은 아직도 과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옷장 안에 갇혀있는 옷처럼…. 딸아이는 그래도 고모에게 마음을 붙여 잘 적응하고 산다. 밤에 자기 전에 자주 우는 것만 빼고는. 나와 아이들은 언제쯤이나 과거라는 옷장의 문을 왈칵 열어젖히고 현실로 뛰쳐나올 수 있을까. 바람이 조금씩 거칠어진다. 비가 오려나 보다. 바람이 잦아지고 거칠어지면 곧이어 비가 내리곤 했다. 통유리 너머로 밖에 걸어 놓은 옷들이 펄럭거리는 것이 보인다. 아내도 어딘가에서 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들처럼 자신을 현실에 잘 매달아놓고 살아가고 있을까. 커튼 뒤에 놓여있는 싱크대로 간다. 수납장 문을 열고 밑이 넓은 플라스틱 그릇을 꺼내 수돗물을 받는다.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아내는 선인장 화분에 단 한 번도 물을 주지 않았다. 발을 절룩거릴 때마다 그릇에 가득찬 물이 출렁거린다. 출입문 앞에 세워진 선인장 화분들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성게 선인장, 둥근 선인장, 게발 선인장…. 언젠가 화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종류가 달라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아내가 화분들을 사왔을 때 나는 왜 그것들의 이름조차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단지 지나가버린 일들은 다 후회가 되기 마련이기에 이제서야 그 생각이 나는 걸까. 자그마한 화분들은 정확하게 열세 개다. 아내는 집을 나갈 때 선인장들을 화분에서 죄다 뽑아놓고 갔다. 화분을 던지기도 했는지 몇 개는 깨져 있기도 했다. 그때 아내는 셀 수 없이 많은 선인장의 가시에 손가락을 찔렸을 것이다. 그 즈음 아내는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하는 나를 조금씩 무시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자신감이 점점 사라져 갔다. 어릴 적부터 앞에 나서지 못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욕심이 많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어머니의 눈에 차지 못하는 아들이었다. 완벽한 형과 달리 매사에 지적과 멸시를 받고 자란 나는 어머니의 말대로 정말 한심한 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쩌다 가끔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까지 그런 눈빛을 보일 때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내향적인 나지만 술을 마시면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대담해지고 난폭해졌다. 아내가 날 멸시한다는 느낌이 들자 어머니한테 느꼈던 모멸감까지 되살아났다. 술이 조금씩 늘어갔다. 내 자신을 제압하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술을 마시고 나면 속에서 아주 날카롭고 강한 가시들이 하나 둘씩 돋아났다. 나는 점점 술에 빠져들었고 내 속의 가시들도 조금씩 자라가기 시작했다. “선인장에도 물을 주나요?” 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든다. 하얀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출입문 앞의 계단에 걸터앉는다. “그렇죠. 가끔 주어야해요.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서 안 되지만요.” 아내는 자신의 뿌리가 썩어버릴까봐 나를 떠나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토록 100% 순면처럼 습기를 싫어했던 까닭도 그것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군요. 뿌리가 썩는군요. 전 물을 무척 좋아하는데…. 남편은 술을 좋아했어요. 결혼한 그 날부터 술을 입에 달고 살았죠. 시어머니도 알코올 중독이었대요. 대대로 그랬다고 시누이가 그러더군요. 내가 술 냄새가 싫어 고개를 돌리고 자면 손찌검을 했어요. 술을 마시지 않을 땐 몹시 착한 사람인데…. 날이 갈수록 술을 더 좋아했죠. 거기에다가 의처증까지 생겼고…. 난 남편에게 맞는 게 너무 싫었어요. 하지만 참았죠. 아이가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이가 자랄 수록 남편의 손찌검은 점점 더 잦아졌죠. 칼까지 들이대며 설쳤어요. 아일 놔 두고 도망쳤어요. 이번에는 너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젠 아이가 뾰족한 가시가 되어 절 마구 찔러대는군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여자가 천천히 일어선다. 여자의 등뒤로 세탁소 안의 비닐 옷장과 배큠 테이블이 드문드문 보였다가 어스름 속으로 슬몃슬몃 사라진다. 바람이 더욱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그릇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원피스에 비닐커버를 씌워서 여자에게 건네준다. 여자가 돈을 지불하고 등을 돌린다. “잠깐만요.” 내 목소리에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출입구로 가서 게발 선인장 화분 하나를 들어올린다. 선인장엔 어느덧 꽃망울들이 맺혀있다. 나는 게발 선인장을 여자에게 안겨준다. 그 전날 심하게 구타를 당한 아내는 비슬거리며 밖으로 나가 선인장 화분 하나를 사왔다. 아내에게 손찌검을 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선인장 화분이 하나씩 늘어났다. 난 아내가 꽃가게를 하는 장모를 닮아 화분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하고 말았다. 사려면 예쁜 꽃들이나 살 것이지 가시투성이인 선인장만 사는 이유가 뭐냐고 몇 번 얘기했지만 조금씩 말이 없어진 아내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관 옆의 신발장 위에는 선인장 화분들이 하나하나 늘어갔다. 어느덧 신발장 아래까지 선인장 화분이 놓이기 시작했다. 내 속에도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들이 빈틈없이 들어차서 자라고 있었다. 그 날도 나는 여기저기 돈을 융통하러 다니다가 새벽녘에야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나는 아예 현관문 열쇠를 가지고 다녔다. 밤 늦게 들리는 초인종 소리 때문에 애들이 놀란다면서 아내가 복사해서 준 열쇠였다. 막 문을 따고 들어오는데 바늘처럼 따끔한 것이 복사뼈 근처를 쑤셔댔다. 그 즈음 여기저기서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는 전화들이 내 옆구리를 끊임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내려다보니 선인장 화분이었다. 와락 울화가 솟았다. 선인장은 내 옆구리까지 함께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내 속에 촘촘하게 들어차 있던 시침바늘 같은 가시들이 와와 소리를 내며 일제히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화분을 냉큼 들어올려서 거실에 내동댕이쳐버렸다. 백색 형광등이 깨진 화분조각들 사이에 나동그라진 선인장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방 문이 열리고 아내가 놀란 토끼눈이 되어 뿌리 뽑힌 선인장과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사실, 너무 놀란 아내의 얼굴을 보고 무척 미안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는 주제에 생활비조차 가져다주지 못하고… 정말 아내에게 미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다른 행동으로 터져 나왔다. 난 또 다른 화분 두 개를 내던지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그때 아내가 나를 향해 울부짖던 말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술에 취해 있었지만 아내의 그 말만은 내 손으로 날마다 다림질하곤 한다. “이런 건 사는 게 아냐! 폭력은 짐승한테나 쓰는 거야! 난, 사람이지 짐승이 아냐!” 아내는 내가 잠든 사이에 아이들까지 놔 두고 사라져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를 찾았지만 헛일이었다. 화장실 앞엔 아내가 벗어둔 잠옷과 전날 입었던 하얀색 원피스가 아이들 옷과 함께 깨진 화분조각들과 흙더미 사이에 나뒹굴고 있었다. 장모에게 뛰어갔지만 아내는 그 곳에 없었다. “이 사람아! 그 불쌍한 것을….” 눈물만 훔치던 장모는 말했다. “고것이 제일 못 참고 살 일을 저질렀구먼. 자네 장인이 날 때리곤 했어. 그럴 때마다 윤이 에미가 어찌나 울고 불고 싫어하든지 장인이 놀래서 어지간할 때면 그만두곤 했어. 술이 심하게 취했을 때는 소용도 없었지만…. 어찌나 걔가 지 아버질 싫어했든지 술병으로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사실, 그 앤 내 친 딸이 아니네. 자네한테 미리 말 안한 건 정말로 미안허네만, 언니가 달랑 고거 하나만 냄기고 죽었을 땐 결혼도 안 허고 고것만 바라보고 살려고 혔지. 다 잘 키우지 못헌 내 잘못이네.” 안으로 들어온 나는 형광등의 스위치를 올린다. 형광등이 제멋대로 몇 번 깜박거리다가 불이 나가버린다.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통유리를 통해 밖을 내다본다. 굵은 빗방울들이 통유리에 부딪치며 흘러내린다. 희망 컴퓨터대리점의 김 사장이 스타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손님의 머리를 감기고 있던 스타가 고개를 돌리고 뭐라고 얘기한다. 김 사장이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본다. 다시 스타에게 뭐라고 얘기한다. 스타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미용실 문을 밀고 나오는 김 사장의 얼굴에는 언제 떼어냈는지 안대가 온데간데 없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 굵은 빗방울들이 들친다. 그는 머리에 오른손을 얹고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더니 다시 대리점 문을 열고 들어간다. 곧이어 간판에 불이 들어온다. 희…망… 컴퓨…터…. 빗방울들이 후드득거리며 떨어진다. 바람에 빗줄기가 날린다. 갑자기 거리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도로 가에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는 가로등에 반짝 불이 켜진다. 가로등 불빛에 빗줄기들이 반짝거린다. 거무스름한 실루엣의 허수아비들이 비바람에 떠밀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종종거리며 거리를 지나간다. 밖으로 나와 셔터를 내린다. 뒷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형광등의 스위치를 올린다. 실내가 환해진다. 세탁소 안의 모든 사물들이 하나하나 살아서 나에게 얘기를 건네기 시작한다. 나는 거친 손놀림으로 비닐 옷장의 자크를 연다. 옷걸이에서 아내의 하얀색 원피스를 꺼낸다. 전원을 넣고 인체 프레스기에 옷을 입힌다. 몹시 단조로운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서 있다. 아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단정한 입매와 유난히 컸던 눈망울을 애써 기억해 본다. 스팀이 나오고 이어서 옷이 팽창하기 시작한다. 아내를 처음 안았던 그 때처럼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프레스기를 꽉 껴안는다. 아내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하다. 바지를 벗는다. 입고 있던 고동색 상의를 벗고 팬티를 내린다. 알몸이 된 나는 아내를 꼬옥 껴안는다. 따스하다. 아직 다 날아가지 못한 솔벤트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아내의 환한 얼굴이 여기저기에서 웃고 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있는 힘껏 원피스를 껴안는다. 아내를 꽉 껴안는다. 아내가 꿈틀거리며 벗어나려 한다. 더 힘껏 아내를 끌어안는다. 숨결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옷걸이 위에 걸쳐진 비닐커버처럼 가볍게, 가볍게 날아오른다. 하아하아, 거친 숨소리도 세탁소의 천장 위에 부딪쳤다가 조금씩 천천히 내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다. 옷장의 자크를 연다. 옷걸이에 항상 걸어두었던 검은색 양복 한 벌을 나무막대기로 내린다. 팬티를 입는다. 비닐커버를 찢어낸다. 옷걸이에서 양복 상의를 벗긴다. 옷걸이 아랫부분에 걸려있는 검정색 바지를 빼낸다. 바지를 꿰어 입고 고동색 상의를 입는다. 빠른 손놀림으로 양복 상의를 걸친다. 프레스기에서 원피스를 벗긴다. 하얀색 옷을 왼쪽 팔뚝에 걸친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싱크대 옆에 있는 뒷문으로 나온다. 굵은 빗방울들이 얼굴과 머리 위에 후득후득 떨어진다. 차갑다. 버스에서 내린다. 마지막 버스다. 비가 오는 신작로는 괴괴한 느낌마저 든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멀리에서 경운기 모터 소리가 들린다. 소 울음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절룩거리며 신작로를 걷는다. 논두렁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한참을 더 걷는다. 군데군데 서 있는 허수아비들이 바람에 깡통소리를 낸다. 비바람에 옷이 젖은 허수아비들은 깡마른 몸으로 양팔을 벌린 채 서 있다. 바람에 날렸는지 모자도 없다. 논두렁을 걷는다. 벼를 베어내버린 논으로 걸어간다. 논 중앙에 허수아비가 서 있다. 비와 바람에 시달려서일까. 허수아비는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한쪽 팔조차 부러졌다. 나는 허수아비 앞으로 걸어간다. 부러진 한쪽 팔을 곧게 펴준다. 원피스의 뒤에 달린 자크를 열고 허수아비의 머리에 씌운다. 허수아비가 하얀색 옷을 입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양복이 순식간에 젖어버린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허수아비 옆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검은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비알갱이들이 얼굴과 어깨 위로 뛰어내린다. 맞은편에 옷을 바람에 날려버린 허수아비 하나가 맨몸으로 비를 맞고 서 있다. [경인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소감 (기정옥) 우체국을 뒤로 하고 거리를 거닐었다. 자동차들은 도로 위를 빠르게 내달리고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겨울에 갇혀버린 세상은 내게 음울한 회색 하늘을 보여주었고 걸치고 있던 코트 자락은 거친 바람살에 자꾸만 펄럭거렸다. 집에 돌아와서 많이 아팠다. 밤에 잠을 자면서 가위에 눌렸다. 오한으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떨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나에게 소설은 인두염 같은 것이 아닐까.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제일 아끼고 예뻐하시던 손녀였던 나는 막상 할머니 영정 앞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또다른 내가 바로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통스러웠다. 나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삶의 순간순간에 몰두하고 열광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가족과 함께 간 야구장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한 떠들썩한 술자리에서도 나는 항상 그 곳에 없었다. 늘 다른 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바닷물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 내가 쓴 소설이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가 소금꽃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다. 강기슭을 헤매고 있던 나를 바다로 이끌어 주신 이원규 선생님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린다.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보답해드리고 싶다. 오감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신 장석남 선생님과 창작교실을 마련해주신 새얼문화재단, 그리고 같이 공부한 벗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나를 위해 기도해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기정옥 약력 1965년 광주광역시 출생 한국방송대학 국문학과 졸업 200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부문 당선 [경인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평 물론 소설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현실을 소재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말 그대로 평범하기만 할뿐인 일상의 한 부분을 오로지 그대로 옮겨 놓는 것만으로 결코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어떤 의미 있는 순간, 즉 현실의 표피 아래 숨겨진 인간과 생의 진실한 한 단면을 포착하여 그를 예술적 과정을 통해 작품 안에 드러내야 한다. 본심에 올려진 스무 편의 작품을 읽어보면서, 대부분 그 기본적인 문제부터 소홀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래 우리 소설의 경향 탓인지, 무엇보다 일인칭 현재시점을 빌려 다분히 감각적이고 영화적인 '보여주기' 식의 묘사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일인칭 화자의 고립된 내면의식을 과도하게 드러내기, 혹은 남녀 관계나 가족을 소재로 다루고 있으나 어딘가 텔레비전 연속극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 설정이 많았다. 한 마디로 신춘문예다운 패기랄까 신선함을 가진 작품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퍽 아쉬웠다. 그 중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은 '활극' '차고 뜨겁고 어두운 것' '즐거운 세탁소'였다. '활극'은 비교적 치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주제의식의 모호함과 미흡한 결말 처리가, 또 '차고…'은 스토리 진행이 매끄러운 반면 피상적인 인물 설정이 각각 결정적인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심사위원 두 사람은 '즐거운 세탁소'를 별다른 이견 없이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소설의 강점은 우선 문장이 다듬어져 있고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호흡이랄까 소재를 다루어내는 솜씨가 안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허름한 동네 세탁소를 무대로, 가출한 아내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화자의 내면 풍경이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와 함께 차분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출한 아내와 화자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또 세탁소를 드나드는 주변 인물들까지 예외 없이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부부관계의 인물들로 설정한 것도 다소 어색하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고, 더욱 정진하시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현길언·임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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