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275 봄볕을 두드리다/고명자
춘삼월 달력처럼 담벼락에 붙어 팬지나 선인장 등을 파는 남자가 있다 손바닥만한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볕이 잘 드는 쪽으로 생을 옮겨보는 남자가 있다 흙 한줌에 용케 뿌리를 내리고 소꿉놀이에 깊이 빠진 어설픈 중년 빳빳한 새 봄으로 거슬러 주기도하면서 봄볕 만지작거리다 그냥 가도 뭐라 말하지 않는다 꽃 따위나 사랑을 하다가 햇살을 등지고 앉아 깜박 졸던 사이였는지 모른다 유리창에는 매화를 뜯어 붙이고 모란 문양을 떠 가난도 꽃이라며서 개다리소반에 김치찌개 한 냄비 소주 반 병 헐벗은 행복을 훌훌 떠먹다 난전의 꽃, 다행이다 그늘 한 뼘은 깔고 앉았다 등줄기 꼿꼿하던 꿈 몇 번의 내리막과 커브를 돌다 둥그러진 남자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다는 듯 국방색 어깨를 담벼락에 척 걸쳐놓고서
―시집『술병들의 묘지』(서정시학, 2013) |
봄볕을 두드리다
고명자
춘삼월 달력처럼 담벼락에 붙어
팬지나 선인장 등을 파는 남자가 있다
손바닥만한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볕이 잘 드는 쪽으로 생을 옮겨보는 남자가 있다
흙 한줌에 용케 뿌리를 내리고
소꿉놀이에 깊이 빠진 어설픈 중년
빳빳한 새 봄으로 거슬러 주기도하면서
봄볕 만지작거리다 그냥 가도 뭐라 말하지 않는다
꽃 따위나 사랑을 하다가
햇살을 등지고 앉아 깜박 졸던 사이였는지 모른다
유리창에는 매화를 뜯어 붙이고
모란 문양을 떠 가난도 꽃이라며서
개다리소반에 김치찌개 한 냄비 소주 반 병
헐벗은 행복을 훌훌 떠먹다
난전의 꽃, 다행이다 그늘 한 뼘은 깔고 앉았다
등줄기 꼿꼿하던 꿈
몇 번의 내리막과 커브를 돌다 둥그러진 남자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다는 듯
국방색 어깨를 담벼락에 척 걸쳐놓고서
―시집『술병들의 묘지』(서정시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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