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냉장고 시 모음 -김영탁/안오일/이재무/유정이/이진/서안나/오유정/강연호/홍일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7. 6. 1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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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여자


김영탁  

 

 

그녀가 내 집에 온 지 10년이 넘었다

우리는 결혼식도 안 하고 간편하게 동거했다

그녀는 지상의 태양들을 가져온 내 식탐을 나무라지 않고,

차가운 인내심으로 잘 받아주었다

 

홀아비가 처녀를 데리고 산다고

주변의 지인들은 손가락질하며 입방아를 찧으며 쑥덕거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장고 여자를 냉녀(冷女)라 부르지 않고

빙녀(冰女) 또는 애빙녀(愛冰女)라고 부르며 서로 말없이 잘 지냈다

보다 못한 친척들이나 지인들이 이 이상한 동거를 해결하기 위해

내 집으로 달려오면, 그녀는 냉장고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기에

실제로 그녀를 본 사람은 없다

물론 나도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그녀의 고향인 저 머나먼 설산(雪山)이나 안나푸르나엘 갔나 하고

냉동실 문을 열어봤지만, 차가운 숨결만 느꼈을 뿐이다

 

그녀와 동거한 지 10년이 넘는, 어느 날부터

그녀는 밤마다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나는 거실로 나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그녀를 찾아보지만,

언제나처럼 그녀는 보이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린다

내 욕심으로 그녀를 너무 오랫동안 묶어두었고

살아오면서 내가 그녀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탓일 것이다

10년 세월에 그녀는 내가 가져다준

언젠가 썩어 없어질 것들을 말없이 잘 받아주었다

더러는 냉장고 문을 열고 할인점에서 산 채소를 잔뜩 집어넣고

며칠이고 집을 비운 사이 채소가 문드러져 그녀의 속을 썩인 경우가 많았다

먹다 남은 순대나 홍어를 싸온 경우 냉장고에 집어넣고 잊어버린 통에

역시 그녀의 속을 속절없이 썩였다

그녀의 고향으로 가는 입구인 냉동실엔

몇 년째 냉동 상태로 썩어가는 떡국과 돼지고기와 소머리가 잠을 자고 있다

아마 그녀는 뜬눈으로 잠을 자면서 태양의 악몽을 꾸지는 않았는지

 

이제 그녀의 흐느낌은 앓는 신음까지 내며 집안을 흔들었다

그래 보내줘야지, 미련없이

이별이라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녀의 문을 열자

태양의 자식들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마지막 차가운 숨결 한 줄기가 내 얼굴을 스친다

 

 

 

―시집냉장고 여자(황금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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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요실금을 앓다


 안오일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냉장고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하는가
그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 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때
연하디연한 그녀 분홍빛 수밀도의 때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의 아랫도리에
화려한 반란이 시작되었다.

 



<2007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화려한 반란


안오일 


 
닦아내도 자꾸만 물 흘리는 그녀
헐거워진 생이 요실금을 앓고 있다
짐짓 모른 체 방치했던 시난고난 푸념들
모종의 반란을 모의하는가
아슬아슬 몸 굴리는 소리
심상치 않다, 자꾸만 엇박자를 내는
그녀의 몸, 긴 터널의 끄트머리에서
슬픔의 온도를 조율하고 있다
뜨겁게 열 받아 속앓이를 하면서도
제 몸 칸칸이 들어찬 열 식구의 투정
적정한 온도로 받아내곤 하던
시간의 통로 어디쯤에서 놓쳐버렸을까
먼 바다 익명으로 떠돌던
등 푸른 고등어의 시간,
연하디연한 분홍빛 수밀도의 시간,
세월도 모르게 찔끔찔끔 새고 있다
입구가 출구임을 알아버린
그녀의 깊은 적요가 크르르르
뜨거운 소리를 낸다, 아직 부끄러운 듯
제 안을 밝혀주는 전등 자꾸 꺼버리는
쉰내 나는 그녀 아랫도리에
반란이 시작되었다

 

  


 ―시집『화려한 반란』삶이보이는창,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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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이재무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녀의 울음은 베란다를 넘지 못한다
나는 그녀처럼 헤픈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누구라도 원하기만 하면 그녀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 몸 속엔
그렇고 그런 싸구려 내용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녀의 몸엔 아주 익숙한
내음이 배어 있다 그녀가 하루 24시간
노동을 쉰 적은 없다 사시사철
그렁그렁 가래를 끓는 여자
언젠가 그녀가 울음을 그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처럼 흔한 것도 없으니
한밤중 늙고 지친 여자가 울고 있다
아무도 그 울음에 주목하지 않는다
살진 소파에 앉아 자정 너머의 TV를
노려보던 한 사내가 일어나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로 간다
그녀 몸속에 두꺼운 손을 집어넣는다
함부로 이곳저곳을 더듬고 주물럭댄다
 

  


―시집『푸른 고집』(천년의 시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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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들이다

 

유정이  

 

 

냉장고를 들였다

내 추운 방에 어쩌자고 덜컥

나보다 더 추운 남자를 들였다

가만히 안으니 어깨를 심하게

떠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오한은 얼음이 얼듯 자꾸만 단단해졌다

이리 저리 포박된 시간을 풀어주고

바람으로 가득 채워진 빈속을 들여다보았다

바람의 이력이 칸칸이 들어차 있는

켜켜이 모래바람 섞여 떠밀려온

남자는 발끝까지 몸이 차다

밤낮으로 그를 여닫으며

홀짝홀짝 추위를 꺼내 마실 것이다

불면을 물감처럼 풀어놓고

이내 잦아드는 동안

썬키스트 오렌지 주스를 불빛처럼 켜둘 것이다

비어 있는 칸칸이

사막의 낙타들로 꽉꽉 채워지지 않아도

별들 사이에서 불빛 한 점 찍어내지 못해도

입 속의 얼음 한 조각

단단한 뼈를 스스로 풀어 가만히 젖어들 때까지

들락거릴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자고

냉장고를 들였나  

 

나보다 춥지 않았다면

당신을 당겨 안지 않았을 것이다

 

    

 

계간열린시학(200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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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사내


이진

 

 

잠들면 떠메고 가도 모르는 집채만한 몸뚱이
그는 한 기의 무덤처럼 덤덤하다
뱃구레만 채워놓으면 세상은 만사형통이다
학교로 유아원으로 아이들을 내보내고 아내도 마트로 출근하면
그때부터 그는 잠의 바다로 출항한다
프로쿠루테스의 침대처럼 발치에는 발목 잘린 식물성이
머리맡은 머리 잘린 동물성 차지다
삼겹살, 고등어, 꽃게, 닭도리탕, 잡채, 비름나물, 해물탕
한바탕 뜨겁다가 식어버린 것들까지 영역을 다투고
미식가인 사내는 잠 속에서도 연신 입맛을 다신다
날 좀 보소!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꿈의 행성을 폭파하면
척커덕! 유아원 다녀온 사내아이가 아이스크림에 목매고
초등학생 딸이 딸기우유를 꺼내 들고 모니터 속으로 사라진다
아내가 유통기한 지난 먹거리를 다시 채워 넣을 때까지
심장에 빨간 불이 켜지도록 그는 어미 새처럼 제 속을 내어준다
제 목줄을 가족들이 쥐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기어 나오는 새벽녘의 울음소리
탯줄 같은 투석기를 등 뒤로 감춘 채
자신의 관 속에서 서서히 부패하는 사내,
쿵! 무너지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등 돌리는 법 없이
오늘도 아침이 그득한 한 집의 식탁을 피워낸다

 

  

<시인시각 제2회 신인상 당선작 중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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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어법


서안나

 

 

사과가 반쯤 썩었다
아픈 쪽에서 단내가 난다
썩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는 법을 배웠다
죽음의 향기로 내일은 선명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사랑이 크게 들린다
열면 환하고 닫으면 캄캄하다
다친 어깨로 자신의 어둠 쪽으로 돌아눕는 것이다
사랑도 그러하다


썩어가는 사과가 썩지 않는 몸 한쪽을 들여다보듯
이별은 훔친 마음을 다시 훔치는 것이다
이빨을 세게 물고
권투선수처럼 두 뺨으로 웅웅거리는 냉장고
열어도 닫아도 속은 비리다
이별도 그러하다
때린 뺨을 다시 때릴 때 젖은 두 손이 아름답다
두 눈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 탓이다

 

 


-계간『문학만』(2010,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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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 꽃 피는 냉장고


  오유정

 

 

  좁은 방에 헌 냉장고가 들어왔네. 짓무른 어머니를 닦아주듯 사과식초로 안과 밖을 깨끗이 닦았네. 시큼하게 퍼지던 어머니 냄새가 한바탕 내부를 맴돌다 돌아가네. 배웅하던 나에게 사과 꽃처럼 손을 흔들던 어머니, 까치발을 높이 치켜들어도 보이지 않네. 찬 눈물을 사과나무에 걸던 어머니가 이제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네. 헌 냉장고에 기대어 밤새 뚝뚝, 숨소리가 떨리고 있네. 방에서 제일 큰 목울대에 묵은 가래로 끓고 있네. 동트는 새벽마다 사과꽃향기 아침보다 먼저 찾아오네

 

 

 

-웹진『시인광장』(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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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강연호

 


누군가 들판 농수로에 내다버린 냉장고
여름 다 가도록 그대로 있다
지난 봄과 달라진 건 이제 문을 활짝 열어
제 속을 온통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탈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제법 선정적이다
다들 지나치면서 얼굴을 찌푸리지만 다만 그뿐
치우라고 누가 신고 좀 하지 다만 그뿐
민원 접수가 없으니 일 만들기 싫은 관청에서도
다만 그뿐, 계절만 또 바뀌나 보다
저렇게 문 열어놓으면 음식들 다 상할텐데
무엇보다 전기세 만만찮을 텐데
사람들이 혀 빼무는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장고는 웅웅웅 밤낮으로 돌아간다
들판을 건너가는 바람이 모터 소리를
이쪽 아파트 단지까지 실어 나른다
바람은 빨래 빨래는 집게 집게는 입 입은 침묵
말잇기 놀이에도 심심한 냉장고
하늘에 풀칠하다 시들해진 냉장고
웅웅웅 들판을 두들기다 지친 냉장고
그의 골똘한 생각은 사실 이렇다
전기 코드라도 누가 빼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월간『현대시』200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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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강연호

 

 

냉장고에는 방이 많다
냉동실과 냉장실 사이
위 칸과 아래 칸 사이
김치특선실과 신선야채실과 과일참맛실 사이
각얼음실과 해동실과 멀티수납실 사이
어디쯤의 중간 소음으로 막연하게
서로 눈 흘기는 아파트 같다
방이 많은 집은 춥다
밥 먹을 때만 각자 문을 열고 나와
수저는 입으로
눈은 TV로
묵묵 식사가 끝나면 다시 각자의 방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문은 언제나 쾅 닫히는데
다들 냉골에 떤다
냉장고는 방이 많아도 가난하다
가난은 마음만 아궁이 앞이란 말이다
냉장고는 잠도 없다
온종일 끙끙 앓거나 웅웅거린다
송곳니를 세운 얼음조각들이 달그락거린다
냉장고는 아무나 열지 못한다
코끼리가 가끔 드나들었다는 전설이
공룡 발자국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아주 큰 냉장고만 들판에 큰대자로 드러누워
비로소 활짝 문을 열어젖히고
방이란 방은 죄다 트고
세상 모르고 잔다

 

 

 

―계간『창작과 비평』(2012년 겨울호)
―이은봉·김석환·맹문재·이혜원 엮음『2013 오늘의 좋은시』(2013,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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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

 

홍일표

 

 

집주인의 양육법이 궁금하다

태생이 다른 농경과 유목의 혈통

방금 전 냉장고가 삼킨 것은

생선 몇 마리

그중 한 마리가 고양이 입속으로 들어간다

생선이나 육류를 좋아하는 식성이 닮았다

냉장고와 고양이는 아픈 기억 탓인지

긴 꼬리를 등 뒤에 감추고 산다

고양이는 주로 검정을 선호하고

냉장고는 주로 흰색을 선호한다

가끔은 서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하는 것이

그들의 습속이다

둘의 연애는 유구하다

본적과 취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고받는 눈빛이 뜨겁고 깊은,

몸속의 환하게 불을 켜고 사는 그들은

24시간 소등하지 않고

푸른 눈빛으로 어둠 위에 군림한다

냉장고 옆에 애첩처럼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둘은 함께 입양한 집주인의 귀가 유난히 길다

 

 

 

시집 매혹의 지도(문예중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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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

 

홍일표

 

 

집 주인의 양육법이 궁금하다

태생이 다른 농경과 유목의 혈통

방금 전 냉장고가 삼킨 것은

생선 몇 마리

그 중 한 마리가 고양이 입 속으로 들어간다

생선이나 육류를 좋아하는 식성이 닮았다

냉장고와 고양이는 아픈 기억 탓인지

긴 꼬리를 등 뒤에 감추고 산다

고양이는 주로 검정을 선호하고

냉장고는 주로 흰색을 선호한다

가끔은 서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하는 것이

그들의 습속이다

둘의 연애는 유구하다

본적과 취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고받는 눈빛이 뜨겁고 깊은,

몸속에 환하게 불을 켜고 사는 그들은

24시간 소등하지 않고

푸른 눈빛으로 어둠 위에 군림한다

냉장고 옆에 애첩처럼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가

집 주인의 커다란 귓속을 밤새도록 들락거린다



 

―계간시안(200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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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최돈선



밤이면 냉장고를 먹어치우고 싶은 사내가 있어요


냉장고는 안쓰럽게도 메마른 눈을 만드느라 아주 분주해요


언 하늘을 받쳐줄 고독조차 있을 리 없어요


허세의 거리만이 케케묵어


삭아져 가는 자신을 안달하네요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이름 모를 통조림 라벨이 유령처럼 떠다녀요


분해된 샤갈의 소가 눈 맞으며 움메움메 울어요


외양간이 어디론가 가버렸나 봐요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로


나무 한 그루 근엄하게 서 있네요


구름 몇 송이 나무에 채집된 채


매미 흉내를 내고 있어요


게으른 시계는 이제 울지 않아요


피맺힌 원한의 숨결만이 냉장고 문이 열리길 학수고대해요


문을 여는 순간


불의의 저격은 참으로 치명적일 거예요


시치미 뚝 떼고 무조건 고요히 신음 소릴 내야 해요


물론 요망스레 오래오래 침통함을 가장해야죠




ㅡ계간『시인동네』(2019,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