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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불이 필요해
구순희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못하고
냉방에서 얼음이 되어 가던 그녀에게
사방을 환히 밝혀 줄 불을 갖다 주었다
얼음처럼 차갑던 그녀는
우울을 먹고 살던 그녀는
불을 보자마자
얼음으로 무장한 마음을 풀었다
그불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원망과 탄식을 버리고 너그러워졌다
불이 간절할 때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폐쇄된 용광로를 들쑤시며
본 적도 없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을 들볶았다
바람둥이 제왕 제우스를 난도질하고
미리 생각하는 사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준 고마운 바보라고 짓뭉갰다
온갖 악이 난무하는 세상에
최초의 여성 판도라가 받은 상자
그 맨 밑바닥에 남은 희망은
진작 날조된 단어였다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욕으로 버무린 독백을 늘어놓는
그녀의 접두사는 불을 향한 저주였다
그런 그녀에게 또 불을 안겨 주었다
세상을 향해 불만을 퍼붓던 그녀는
불을 받는 순간 언제 그랬느냐 싶게
다시 달관한 표정이 되었지만
그녀를 에워싼 얼음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여간해서는 녹지 않았다
오매불망 기다려도 채워지지 않는 그 불은
끊어진 수도와 전기를 잇는 다리였다
밀린 아파트 관리비와
빈속을 채워 줄 밥이었다
―웹진『시인광장』(201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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