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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2) -思考의 轉換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2. 2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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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 시 창작 강의 (2)


                         思考의 轉換


시인의 사고는 일반인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사물에 대한 접근을 피상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상식이 될 것이며 논리적인 접근을 한다면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될 것입니다.

시는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습니다. 시인마다 각기 자기대로의 생각이 있고 자기 나름의 시론이 있으며 그것은 또한 틀린 것으로 말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정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선문답처럼 오묘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상식의 틀을 벗어난, 비상식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고의 접근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나 현실세계에서는 만족하는 일이 없으며 늘 변형된 세계를 꿈꾸기 때문에 플라톤은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시인이 추방된, 또는 시인이 없는 세계야말로 진정한 평화가 유지되고 논리가 통하는 사회가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추측하지 않아도 절로 그 말의 의미를 곱씹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늘 변혁을 꿈꾸며 논리와는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딴에는 시인을 어린애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식―꾸밈없는 솔직한 본질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애들은 거짓말을 할 줄을 모릅니다. 어른들이 거짓을 말하면 그것을 수정하여 어른들을 무안하게 할 줄도 압니다. 또한 눈치를 살필 줄도 모릅니다. 염치나 체면 같은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느끼는 대로 말하고 보여지는 대로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사는 세상은 장식, 꾸밈과 논리와 상식으로 뭉쳐져 있는 거대한 인공 섬일 뿐입니다.


    (가)-바위를 깎아 연꽃좌대를 만들고

         보살입상을 새겼으니

         생명은 영원하다


    (나)-바위에 꽃이 피었다

         연꽃보좌를 밟고 선 미륵보살

         빙긋 미소를 머금어 천년을 산다


위의 두 형태의 시에서 (가)는 논리적이며 설명적입니다. 드러내는 의미가 평면적이며 또한 상식적입니다. 여기에 비해 (나)는 논리성이 파괴되고 첫 행부터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바위에 꽃이 핀다는 것은 전혀 현실세계에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논리학자가 보았다면 기절하고도 남을 엉터리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면 황당무계하고 논리학자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말이 되겠지만 그 다음 행에서 「연꽃보좌」와 「보살상」이 나옴으로 하여 ‘바위의 꽃’은 논리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학적 논리라고 합니다. 시는 이러한 문학적 논리성에 의해 상호 연결되어야 하며 이는 이미지와 이미지에 의한 연결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의미의 연결이 가능해지고 전달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에서 ‘생명은 영원하다’는 말은 선언적이며 관념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은 유한한 것으로 되어져 있으나 보살입상의 좌대를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질 수도 있지만 생명이 영원하다는 관념에 덧붙여져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세 번째 행은 생명이나 영원이라는 말은 없어도 보살상이 가진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으며 장구한 세월, 여기에서는 천년이라 표현했지만 사실은 천년이라는 제한적 시간에 묶이지 않고 오랜 세월이라는 의미로 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은 시적 사고에 따른 행동논리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의 눈에는 현실이란 늘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로 비춰질 것이며 그것을 바꿔야 할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시적 발상은 바로 콜럼부스의 달걀입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겠지요.

상식적인 사고는 빛을 반사하는 달 표면에 불과합니다. 달에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표면도 있다는 것을 함께 생각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바로 시적 사고입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보편적이며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입니다. 누구나 그것을 부인할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물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러 간다’고 사고할 수 있습니다. 혹은, ‘물은 높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간다’고 사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곳으로부터의 탈출, 바로 그것이 시적 사고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물이 되어/내리고//

나는/흙이 되어/받는다//

하늘은/맑은/기쁨으로/내리고//

나는/어두운 가슴으로/받는다//

이렇듯/다른/하늘과 내가/함께 하는 시간//

하늘은/늘 푸른/모습으로/멀리 있더니//

오늘은/낮게/내려앉아/대지를 품는다//

무슨 말을/하더라도/반가운/정다운 물빛 사연//

단조의 음울한/선율도/장조의/명랑한 노래도//

자꾸/듣고 싶어/귀 기울이게/되는/너의 언어는//

언제나/나를/새롭히는/생명의 언어//

네 푸른 음성에/풀들은/파아랗게 젖었다//

하늘은/어쩌면/이렇게/기쁘게 만나려고//

높이 올라가서/내려보고//

나는/그리움의 눈빛으로/바라보게 되었을까.

                             독자 시 <하늘> 전문


현실체계에 대한 불만으로 시적 사고는 존재하며 그러므로 시인은 창조자이기 앞서 파괴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부정, 부인하지 않고 새로움을 빚어 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부터 부수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처한 현실의 삶까지 파괴하지 마십시오. 그런다면 당신은 결국 정신이상자로 분류되어 따로 가야할 곳이 생겨나게 될 것이니까요.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아무데서나 서서 소변을 본다. 둑을 걸어가는 여자에게, 그 때까지 한 번도 입에 담아 보지 않았던 상소리를 큰 소리로 던진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진다.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불문곡직하고 상대방을 두들겨 팬다… 눈앞에 보이는 투명한 세계도 실제로 거기에 몸을 던져 넣으면, 생각하고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미지는 뚜렷해서, 사물을 생각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그 증거로 그럴싸한 고상한 말이 입에서 나오려고 하면 언제나 그 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말에 동의해야 합니다. 시인이나 작가는 철저한 자기 파괴에 의해 새로움에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에게 영합하거나 자기세계에 안주한다는 것은 새로운 작품 쓰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를 바 아닙니다.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보다 더 고독해야 하고 보다 더 쓸쓸해야 합니다. 그것을 감내하지 않고서는 시인이 되려 하지 마십시오. 시인은 고독한 창조주에 버금가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소설가는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결국 작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家’를 붙여 주고 말뿐이지만, 시인에게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人’자를 붙여 주는 것입니다. 누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합니다. 이제 의식의 전환으로 어렵고 힘든 시인에의 길을 프르스트의 「가지 않은 길」중의 하나인 아직 가보지 않은 남은 하나의 길을 쉽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 함께 생각해 보기

(1) 상식과 상식으로부터 벗어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