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 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 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받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받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작품 출처 : 김수영, 『김수영 전집1』, 민음사, 2009.
김수영 |「꽃잎2」를 배달하며…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무엇에 중독되었냐구요? 꽃이랍니다. 집안 곳곳에 꽃을 가득 두면 “단조로운 허무함에 맞서는 노랑, 하양, 빨강, 파랑, 분홍의 반박”이 느껴져 아내의 부재를 겨우 견딜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꽃이 필요하세요? 시인은 예전과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누군가와 주고받기 위해서 꽃을 원하네요. 그런데 간절히 원하던 꽃은 금세 보기 싫은 꽃이 됩니다. 꽃잎은 시들고 마르고 떨어지니까요. 그렇지만 시인은 노란 꽃이 져도 또 꽃이 핀다는 것을 믿습니다. 계속 필 것이라는 꽃의 약속이 우리 눈앞에서 떨립니다.
시인 진은영
* 크리스티앙 보뱅, 『인간, 즐거움』, 이성민 옮김, 문학테라피, 2013.
문학집배원 시배달 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교수 ▪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저서 『시시하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향하여』, 『문학의 아포토스』,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