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읽고 -수필

배를 매며 / 배를 밀며 -장석남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6. 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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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시집왼쪽 가슴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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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시집왼쪽 가슴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0)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당신은 배를 매어본 적이 있나요. 어디서 어떤 배를 매어보셨나요. 배를 밀어본 적은 있나요. 어디서 어떻게 밀어보았나요. 망망대해를 떠돌다 항구를 찾아드는 배는 필연도 우연도 아닌 인연이라 부를 수 있나요.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 배는 태풍이 오기 전까지는 빛 가운데 고요히 떠 있습니다.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배를 매는 것은 붙드는 것, 배를 미는 것은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붙드는 것이 구속이라면 밀려진 배는 자유입니다. 아니 방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밀은 배 지금 어느 바다를 가랑잎처럼 떠돌고 있을까요. 아니면 어느 낯선 항구에 정박해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있을까요. 항해 중이든 정박 중이든 당신이 밀은 배는 오늘도 당신 안에서 소리도 없이 포말을 일으키며 항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조선일보 연재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 ~ 50) - 목록과 시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46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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