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잖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날 몇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애기해보세그려.
―시집『조지훈 전집 1』. 나남.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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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애인
신표균
전혀 뜻밖에 내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예상치도 바라지도 않은 그가
짝사랑을 해왔는지
집시되어 떠돌다
손잡아 주는 이 하나 없자
나를 찜한 모양입니다
징그러워 온 몸 움츠리는데
그는 신이 나서
혈관타고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며
내 육체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조심조심 뜨는 밥숟가락에도 제 먼저 올라앉고
물 한 모금 과일 한 쪽 먹는데도
떨어질 줄 모릅니다
싫다고 싫다고 밀쳐내도
진드기처럼 붙어 다닙니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라치면
마누라 사이에 끼어들어 커튼을 칩니다
아! 이젠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어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며 쓰다듬고 보듬어
동반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당뇨애인
―시집『어레미로 본 세상』(심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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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지만 우리네 정서는 병에 대해서만큼은 가족들이 당사자에게 숨기고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불치의 병이라고 하면 환자가 충격을 받아 자포자기할 수도 있고 치료를 게을리 하여 더 빨리 보내게 될까 두렵기도 하고 또 그게 자식된 도리라고 믿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티브를 보니 본인 자신도 암을 앓았었고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한인의사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특별한 사고는 의사가 암에 대한 선고를 내리면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고 합니다. 의사는 쌓아온 경험과 학계에 보고된 통계를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에 의사가 신이 아닌 이상 환자의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 의사인들 알 수는 없겠지요.
병에 대한 별다른 개념이 없던 젊은 시절엔 병 하면 감기만이 병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감기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고 실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몸도 기계라 오래되면 삐거덕거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여간해서는 낯선 이방인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고 친해지지도 않으며 또 친해지고 싶지도 않는 게 병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늙어서 오는 병을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막을 수도 없습니다.
병에 대한 두 편의 시를 봅니다. 조지훈 시인의 '병에게' 가 모든 병을 아우르는 포괄적이라면 신표균 시인의 특정병을 지칭한 당뇨애인은 개괄적입니다. 어느 병이든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처음에 병이 찾아왔을 때 초기에 잘 다스려야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예고도 없이 날아오는 돌처럼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하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왜 하필 나냐고, 나한테 왜 이러느냐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 병 또한 왜 내 탓을 하냐고 성을 내겠지요. 두 편의 시에서 배웁니다. 마누라 사이에까지 끼어 드는 몹시 성가스러운 존재지만 병이 찾아왔을 때 떨쳐내려고 애쓰지 말라고 합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다정한 친구처럼 잘 대해주라고 합니다. <정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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