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북한산) 노적봉>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뵈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시집『그늘』(시월, 2012)
세상에는 사람도 많다. 오늘 하루도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사람들과 마주치기 시작한다.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도 마찬가지다. 버스는 만원이고 지하철도 얼마나 사람들로 넘쳐나는지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고 송곳처럼 뻣뻣이 서있어야만 한다. 일행이 아니라면 아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저장이 되어있다. 친지나 친구, 학교 동문 동창, 사업 거래처, 직장동료, 같은 취미를 가진 동호회 회원 등등...
예전에 수첩을 가지고 다닐 때는 인연의 줄이 끊어진 자리에 따라 까만 줄, 붉은 줄이 쭉쭉 그어져 있었다. 지저분하지만 연말이 돼야 새 수첩을 장만하면서 하나하나 옮겨 적을 수 있었다. 정리를 하면서 그어진 줄의 인연도 한번쯤 되짚어보곤 했는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라고나 할까. 휴대폰 세상인 지금은 한번 삭제를 하고 나면은 다시금 되새겨 볼 추억의 여지도 흔적도 없다.
연이 다한 소용이 없어지면 그때마다 지워서 연말이라고 해서 새삼 지울 사람도 없는데 들여다보면 지울까말까 하다가 그냥 둔 이름이 보인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탯줄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세상에 나오면 이내 그 줄을 잘라야 한다. 필요 없는 줄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필요에 의해 임시로 저장이 되었다가 바로 지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오래도록 저장이 되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살아서 내 이름 지워지지 않기를 원하지만 내가 소용이 없으면 상대방을 지우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무용이 되면 지울 것이다. 다만 필요가 없어서 지워지기를 바랄 뿐 어떤 악연의 끈으로 맺어져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는 사람이 되어 삭제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를♠읽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따뜻한 봄날/김형영 (0) | 2019.03.25 |
---|---|
내 죄 / 이 성 (0) | 2019.01.05 |
약속/천상병 (0) | 2018.11.24 |
병에게/조지훈 -당뇨애인/신표균 (0) | 2018.10.15 |
내 눈을 감기세요 / 김이듬 (0) | 2018.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