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죄
이 성
“비가 오네. 진작 나갈 걸”
중엉거린 한 마디에
옆집 담장 너머 피던
꽃 한 송이 떨어졌다나
“비가 오네. 진작 나갈 걸”
중얼거린 한 마디에
조용히 내리던 빗줄기 속에
시퍼런 칼날이 번쩍이고
잠자던 처녀가슴에
천둥 벼락이 떨어졌다나
삼도천 건너던 누이
사흘을 울다
길을 잃은 게
내 죄라나
“비가 오네. 진작 나갈 걸”
혼자 중얼거린 것도
때 못 맞추면
바람 없는데 문득
새파란 사과 한 알 떨어진다나
―시집 『엘리스 개구리』(이든북,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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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네. 진작 나갈 걸” 후회하듯 중얼거린 말에 꽃 한 송이 떨어지고 벼락이 떨어지고 길을 잃고 사과가 떨어진 것이 내 죄라니... 문득 김동환의 시 -‘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가 떠오른다.
웃은 죄/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도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신세기》(1938. 3)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한때 내 탓이오 가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탓’이란 잘못된 일이나 부정적 현상을 야기한 원인이나 까닭이 모두가 나 때문이라는 것이다. 꼭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할지라도 어떤 인과의 연결고리로 생긴 일이라면 남 탓을 하면서 굳이 변명하거나 발뺌하는 것보다 쿨하게 잘못했다 이해하라 하면 어느 정도 용서가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웃는다고 해서 평양성의 해가 해 안 뜰 리 만무하고 중얼거린다고 해서 꽃이 지거나 벼락이 치거나 사과가 떨어지지 않겠지만 네 탓만 하고 모든 것을 아니꼽고 못마땅하게 본다면 웃은 것도 죄고 중얼거리는 것도 죄가 될 수 있겠다. 원인불명을 제공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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