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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말 -봄날은 간다 3 외 6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12. 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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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말 -봄날은 간다 3 외 6편



봄날은 간다 3

매미 4

달팽이

은해사 사랑나무

가을 전령

오래된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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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3

 

신순말

 

 

멀리서 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아름다움만을 바라보기엔

지치도록 가까웠던 모양

 

풀밭을 건너고 물결을 지나고

아득해지기 바로 전쯤의 그 건너편에

나와 당신 마주 서있던 날

 

아득한만큼의 그 거리가

그리움이었다

 

꽃들 피어,

지는 것도 아름다운 이 봄날

 

멀리서보는 풍경은 언제나 더 아름답다

 

 

 

―들문학제25상주문학회(세종기획,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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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말


 

평생을 부려왔던 노동의 시간

 

어느덧 서녘은 별 하나 반짝인다

 

느리고 묵묵하게 끌어오던 무게

 

그 넓던 등은 어느 결에 얇아졌다

 

아버지 낮은 안경 너머 세상은

 

언제나 새김질이 필요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꼬리를 뉘면

 

삶이 꿴 코뚜레에도 평안한 얼굴

 

굽이치는 세파에도 쓸리지 않은

 

우직한 무릎의 저녁이다




―들문학제25상주문학회(세종기획,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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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4

 

신순말

 

 

그들이 놓고 간 수많은 허물을 본 적 있다

몸을 내보낸 등은 하나같이 갈라져 있었다

그들은 힘차게 날아가 온 여름을 부르다가

서늘한 바람 불면 바닥으로 떨어진다

소리가 모두 빠져나간 악기처럼

병상마다 울음으로 소진한 몸을 취고

수많은 매미들이 누워 있다

많은 마무를 놓아두고 요양원 망창에서

이틀을 울고 가던 매미

그는 어디쯤에 제 허물을 두고 왔을까

숲의 허물을 흔들며 지나온 바람

미동도 없는 악기를 한 번 더 퉁기며 지나간다

    

 

 

―들문학제25상주문학회(세종기획,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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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신순말

 

 

  때때로 집의 무게는 등짐만 같았을까요

 

  그 무게로 숙여 사는 동안 아무리 재게 걸어 보아도 딱 그만큼의 속도만 날 뿐, 푸른 잎사귀에 숨어들 듯 그 생의 갈피를 갉는 동안 둥굴게 쌓아올린 나날들에 얇아진 아비의 등

 

  아버지,

  당신의 등은 더 무거웠을까요

 

 

 

문학제25상주문학회(세종기획,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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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사랑나무

 

신순말

 

 

지난한 세월 엮어 느슨해진 서랍들

 

나를 따라 살아온 옷장을 열어보면

 

간마다 가지 얽듯이 당신과 나 섞여 있다

 

백년의 절반이라도 나란히 살다보면

 

장롱처럼 늙어져서 세월을 얹다보면

 

연리목 연리지처럼 얽은 잎을 피우거니

 

아득한 날 불던 바람 서로를 스쳐 지나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상처에 상처를 묻어 백 년 정진 중이다

 

 

 

문학제25상주문학회(세종기획,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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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전령

 

신순말

 

 

초저녁부터 어디선가 운다

내 귀밑에도 살았던가

지치지도 않고 음력 팔월 초이례

달이 비슴해지도록 운다

섬돌도 없고

마루도 없고

정지의 나무문도 아궁이도 없는데

칠층 아파트를 단숨에 올라서는

가슴 스며드는 저 소리

가을꽃 몇 송이

문짝 창호지마다 바르면

흙 마당에도 별이 서성이던 옛집

누구의 귓속이든 구절초 피는 소리

세상 집마다 오늘은 섬돌이 생겨나

귀똘이 늦도록 울어준다

 

 

 

문학제25상주문학회(세종기획,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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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골목

 

신순말

 

 

사람들의 갈피에 든 비밀을 엿볼 때가 있다

누구라도 오래된 골목길 하나쯤

두고 온 마음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 날

빗방울에 젖혀지던 호박꽃과

기와 담장 위에 두고 온 눈사람

두고 온 손바닥의 온기 같은 것

나의 골목은 여전한가 가끔은 궁금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골목길에서

오래된 스스로의 골목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깊숙한 골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문학제25상주문학회(세종기획,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