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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집 -정희성/서영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12. 1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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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집

 

정희성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문을 낮게 낸 것일까

무심코 열고 들어서다

이마받이하고 눈물이 핑 돌다

낮게 더 낮게

키를 낮춰 변기에 앉으니

수평선이 눈썹에 와 걸린다

한때 김명수 시인이 내려와 산 적이 있다는

포항 바닷가 해돋이 마을

물이 들면 언제고 떠나갈

한 척의 배 같은

하얀 집

내가 처음 이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눈썹에 걸린 수평선이

출렁거릴 따름이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창을 낸 것일까

머물다 기약 없이 가야 할 자들이

엉덩이 까고 몸 낮춰 앉아

진득이 세상을 내다보게 함일까

 

 

* 민박집 명함에 쓰인 이 글귀는 누구의 시구일까.

 



―시집『돌아다보면 문득』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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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위의 집

 

   서영처

 

 

  언덕 위에는 구름이 있고 햇살이 있고 하얀 집이 있고 하얀 집의 눈부신 고독이 있고 구름이

떠간다 바람이 분다 언덕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노루 사슴들 음표처럼 뛰어놀고 구름이 피어

나는 집 구름이불을 덮고 자는 집 창문으로 들락거리는 구름을 벽장에 차곡차곡 개어두는 집

들소들의 발굽 소리 지축을 흔들고 밤이면 별이 총총한 집 별무리들 모여 자는 귀가 환하게

밝아오는 집 언젠가 저 별들을 쫒아다닌 시절이 있다 바람 부는 날에도 언덕 위의 집 비오는

날에도 언덕 위의 집 걱정 근심 없는 집 메아리 찾아 골짜기를 헤매다 문득 올려다보면 햇살

아래 홀로 서 있는 집 근경은 없고 원경만 있는 집 세계를 정원으로 삼은 집 세계로부터 멀어진

섬 같은 집 아무도 살지 않는 집 공명하는 집 갈수록 희미하게 들리는 언덕 위의 집에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고 백일잔치도 부고도 없고 그래도 내 노래는 언덕 위의 집 마지막 노래도 언덕 위의

집 언덕 위엔 구름이 흘러가고 햇살이 눈부시고 키 큰 나뭇가지에 매단 그네가 흔들리고 바람이

분다 언덕 위에 집을 지어야한다 아이들 노루 사슴처럼 뛰어놀고 이제나저제나 근심이불을 덮고

자는 집 우는 아기 어르다 보면 가로등 총총한 고가도로 위로 자동차들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뿜으며 달려가고 벽장 속의 구름이불을 껴안고 아이들 시끌벅적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는 집

 


월간『시인동네』 (2018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