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김용화
소한날 눈이 옵니다
가난한 이 땅에 하늘에서 축복처럼
눈이 옵니다
집을 떠난 새들은 돌아오지 않고
베드로학교 낮은 담장 너머로
풍금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아침입니다
창문 조금 열고
가만가만 눈 내리는 하늘 쳐다보면
사랑하는 당신 얼굴 보입니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메아리처럼
겨울나무 가지 끝에
순백의 꽃으로 피어나는 눈물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한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기다림의 세월은 추억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되는 까닭은
당신을 만나는 일이
내가 살아온 까닭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 피가 식어질 때까지
나는 이 겨울을 껴안고
눈 쌓인 거리를 바람처럼 서성댈 것입니다
―시집『첫눈 내리는 날에 쓰는 편지』 (문학세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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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오는 날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 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시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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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이원규
그대 어깨위로 내리는
정갈한 슬픔이고 싶었습니다
송이송이 눈꽃사연
밤새 온몸 적시면
그날밤엔 내가 먼저
산짐승처럼 목놓아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게
언제나 내 맘 같을 수만은 없는 것을
결국 나보다 먼저
울음을 터드린 그대의 삶
정말이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우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울기 위해 만난지도 모르는 것을
누가 먼저 울고
나중에 울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대 생각하는 밤마다
두고두고
첫눈이 내립니다
―시집『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실천문학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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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김진경
길바닥에까지 전을 벌여놓은
마포 돼지껍데기집
빨갛게 달아오른 연탄 화덕을 끼고 앉아
눈을 맞는다
어허 눈이 오네
머리칼 위에 희끗희끗 눈을 얹은 윤가가 큰 눈을 뜬다
대장간에 말굽 갈아끼러 왔다가
눈을 만난 짐말들처럼
술청 안의 사내들이 술렁댄다
푸르륵 푸르륵 김을 뿜어대기도 하고
나는 화덕에 쇠를 달구는 대장장이처럼
묵묵히 화덕에 고기를 얹어 굽는다
길가의 플라타너스가 쇠의 녹슨 혓바닥처럼
남아 있던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풀무질을 세게 해서 저것들을 달구어야겠다
말랑말랑해진 혓바닥을 두드려 쇠발굽을 만들어야겠다
저 갈기 푸른 말들에 새 발굽을 달아주어야겠다
오늘 밤 눈 쌓인 재를 넘어 다음 장으로 가기도 하고
딸랑딸랑 말방울을 울리며 사랑하는 이의 집 앞에 멈춰 서기도 하리라
붉게 단 쇠발굽을 물에 담금질할 때처럼
연탄 화덕에서 푸르게 연기가 솟는다
―시평 창간호『거미가 짓는 집』(바다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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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이현우
작별이다.
몸부림 한 점 없는 최후의 만남이다.
부스러기를 태우며
빈손으로 돌아온 저녁
길은 안인리에서 끝나고
저문 들마다 허수아비가 죽는다.
잘 가라
엇갈린 세상을 접고 또 접어
동면하는 삼라만상
돌아보면 우린 모두 걸인乞人이었다.
연기처럼
땅에서 하늘로
연기처럼 피어올라 가루가 된 소망이
다시 모여 쌓이는
여기
끝 모를 심연深淵에도
생명은 더없이 아름다운 것
낯선 거리를 떠다니다가
뿌리째 마르다가
한 아름 맞이하는 축제의 등불
꽃잎 지듯
꽃잎 지듯 날아 앉는다.
―시집『문밖에서 부르는 노래』(책만드는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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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이진엽
문득 깨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새벽의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수만 장의 흰 전단을 뿌리며
온 세상으로 번져 가는 조용한 외침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둠도 밤의 아들도 아닌
오직 피가 맑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일으킨
새벽이 하얀 반란
나는 마음속으로 손벽을 짝짝 쳤다
―계간『미네르바』(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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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사근 첫눈이
이화은
눈이 온다 서울 여자처럼
사근사근사근사근
큰오빠를 홀린 서울 여자를
집안 어른들은 여시라고 했다
발자국이 없을 거라고 했다
사근사근사근사근
서울말은 우리들 눈썹에 머리칼에
손등에 닿자마자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우리는 침을 흘리며
그녀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녀가 울며 떠나간 날도 눈이 내렸다
면사무소 국기 게양대처럼 꿋꿋하던 큰오빠가
시든 열무 잎처럼 변한 것도
그 여시 때문이라고
눈이 온다
흰 속치마 속에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추고
무덤덤 담벼락에 전봇대에
오래 눈을 감고 있는 늦은 골목에
발자국도 없이
사근사근사근사근
―계간『시인수첩』(201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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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박성우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다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는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동아일보, 2016년 12월 0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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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김 병 호
밤새 짐승이 울었다
해 질 녘에 다녀간 사슴이라 생각했다
새벽은 검고 울음은 뜨거웠다
당신은 그때부터 있다
눈밭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서 있는 당신을 보았다
첫눈을 온몸에 새겨 눈물을 가리는, 당신
빈 가지에 별자리를 묶고 싶은, 나
아흐레쯤 굶은 짐승의 배 속 같았다
그 안에서 입술들이 날아든다
울음을 떼어 낸 입술들
내 것도 아니고 당신 것도 아닌
심장이 다 부르트겠다
ㅡ시집 『백핸드 발리』 (문학수첩,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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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강연호
죽은 자의 빈집에
산 자들이 다들 모여 왁자지껄 신이 난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웃음이 없던 그가 영정 속에서 웃고 있다
첫눈이, 아 첫눈이
조등을 적시며 밤새 내릴 기세다
이 세상의 눈은 모두 첫눈인 듯 반갑고
이 세상의 사랑은 모두 첫사랑인 듯 그립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평생 울고 싶었던 그는 왜 죽자고 웃고 있는가
그럼 울어? 첫눈인데?
우아한 용서는 첫눈이 다 한다
정말 이 세상의 죽음은 모두 첫죽음인데
초상집의 소주는 왜 이리 늘 달디단가
산 자들은 저마다 살 궁리에 바빠 돌아가고
죽어 빈집을 나온 그는 노숙이 걱정이다
ㅡ계간『파란』(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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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강성남
그 겨울, 당신을 옮기려다 깨트렸다
나는
나를 보기 위해
당신 앞에 다시 섰다
당신의 내면은 금간 거울로 가득하다
내 왼쪽과 당신의 오른쪽은 닮았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본 건
떨어뜨린 말의 파편들이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당신에게
나는 나에게
온몸을 다하여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내 눈에서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진다
얼룩진 당신이
뼛속에 박혀 나오지 않던 당신이
눈이 되어 내린다
얼었던 심장이 녹고
내 속에 박혀 있던 깨진 당신이
빠져 나온다
당신이 있어서 견딜 만했다
―계간『다시올』( 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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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김경후
이미 내린 첫눈이
지금 처음 내린다
내린 적 없는 눈이
아직 내린다
불지도 않은 바람이
있지도 않은 소용돌이무늬를
기억하고
이미 사라진 바람은
있지도 않은 나의 날개를
찢어
입 속으로
흩뿌린다
눈,
눈,
눈, 눈,
눈,
눈,
눈,
눈,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내릴 수 없는
마지막 눈이 이제야 끝나지 않는다
―웹진 『시인광장』(201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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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관한 추상성
강재남
낮잠에 든 고양이가 당신을 읽느라 영영 잠에 빠진 일을 기억한다
당신이란 이름으로 상상력이 번창하던 일이라든지 아키달리아평원에 내리는 첫눈에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도
화성의 남부 어느 지점에서 매일이 무너지는 일기를 썼던 건
꿈에서 빠져나온 고양이를 위하여 영영 꿈에 잠긴 고양이를 위하여
그리고 창문에 걸터앉아 빗질을 했지 치렁한 머리카락이 한줌씩 빠지고
기억이 닳고 있었지 잎이 떨어진 나무처럼 맨몸으로 계절을 맞는 나무의 체질처럼
그때 당신 얼마큼의 보폭으로 걸었었니?
비어버린 당신이 헛헛하게 보낸 계절, 벙어리장갑을 끼고 벙어리가 돼버린 당신의 고양이
첫눈이란 말처럼 추상적인 게 있을까 당신이라는 미묘한 감정은 또 어떻고
―웹진『시인광장』(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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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도 첫눈
이세기
바다오리 떼 살얼음 바다에
물질을 하는데
허옇게 물살 이는 소리
이윽고 밤 되어 눈이 내리고
바닷가에 눈이 내리고
쪽마루 방자문 위에 걸린 가족사진에도
눈이 내리는데
갯 떠난 자식 생각하는가
밤 깊어가는데
굴봉 쪼는 소리
밤바다에 성근 눈발이 내리고
굴봉 쪼는 소리
허옇게 물살 이는 소리
밤바다에 눈은 내리고
― 함민복 지음 『절하고 싶다』(사문난적,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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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아침
이은봉
첫눈 아침, 바윗돌처럼 단단한 한기 품고
시리게 얼어붙은 웅덩이 속 헤매고 있다
아침 첫눈, 하얗게 번져오는 햇살 품고
막 눈 뜨는 시냇가 버들개지 위 떠돌고 있다
너무 추워 큰 귀때기 쫑긋대는 산노루의 걸음으로
첫눈 아침은 내일 아침에나 온다
너무 시려 빨간 코끝 벌룽대는 꽃사슴의 걸음으로
아침 첫눈은 모레 아침에나 온다
내일 모레, 내일 모레, 내일 모레……
반야심경처럼 외워 보는 꿈
모레 글피, 모레 글피, 모레 글피……
법구경처럼 외워 보는 희망
버석대는 명아주 꽃대궁을 밟으며
느릿느릿 걸어오는 첫눈 아침이 있다
뽀얗게 껍질 벗는 버짐나무 줄기를 걷어차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아침 첫눈이 있다
그것들, 오늘 여기 있지 않아 마음 환하다
그것들, 지금 여기 있지 않아 가슴 벅차다.
―시집『첫눈 아침』(푸른사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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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이 오는 소리
김고니
서쪽 산이 붉은 하늘을 이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해를 삼킨 나무들이 바람에 어깨를 떨며
온밤을 지키는 소리를 들었다
) -->
고기잡이배들이 항구로 돌아오며
새벽울음소리를 감추는 것을 보았다
삼켰던 불덩이에 데어 붉게 멍든 바다,
물거품으로 흐느끼며 눕는 소리를 들었다
) -->
첫눈이 내리던 날
바람꽃이 피는 소리를 들었다
서쪽 산이 일어나는 것보다 더 슬픈
바람의 눈물을 보았다,
) -->
바다가 눕는 것보다 더 아픈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 -->
―시집 『팔랑』 (시산맥,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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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관한 추상성
강재남
낮잠에 든 고양이가 당신을 읽느라 영영 잠에 빠진 일을 기억한다
당신이란 이름으로 상상력이 번창하던 일이라든지 아키달리아평원에 내리는 첫눈에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도
화성의 남부 어느 지점에서 매일이 무너지는 일기를 썼던 건
꿈에서 빠져나온 고양이를 위하여 영영 꿈에 잠긴 고양이를 위하여
그리고 창문에 걸터앉아 빗질을 했지 치렁한 머리카락이 한줌씩 빠지고
기억이 닳고 있었지 잎이 떨어진 나무처럼 맨몸으로 계절을 맞는 나무의 체질처럼
그때 당신 얼마큼의 보폭으로 걸었었니?
비어버린 당신이 헛헛하게 보낸 계절, 벙어리장갑을 끼고 벙어리가 돼버린 당신의 고양이
첫눈이란 말처럼 추상적인 게 있을까 당신이라는 미묘한 감정은 또 어떻고
아키달리아평원에 눈이 내린다 비인칭적으로 혹은 중성적으로
―웹진 『시인광장』(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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