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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대한 시 -김명인/조지훈/신표균/이화은/허수경/김제현/공광규/박남준/신미균/이재무..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10. 3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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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디서 무슨 병 깊이 들어


김명인

 


길을 헤매는 동안 이곳에도 풀벌레 우니
계절은 자정에서 바뀌고 이제 밤도 깊었다
저 수많은 길 중 아득한 허공을 골라
초승달 빈 조각배 한 척 이곳까지 흘려 보내며
젖은 풀잎을 스쳐 지나는 그대여 잠시 쉬시라
사람들은 제 살붙이에 묶였거나 병들었거나
지금은 엿듣는 무덤도 없어 세상 더욱 고요하리니


축축한 풀뿌리에 기대면
홀로 고단한 생각 가까이에 흐려 먼 불빛
살갗에 귀에 찔러 오는 얼얼한 물소리 속
내 껴안아 따뜻한 정든 추억 하나 없어도
어느 처마 밑
떨지 않게 세워 둘 시린 것 지천에 널려


남은 길 다 헤매더라도 살아가면서
맺히는 것들은 가슴에 남고
캄캄한 밤일수록 더욱 막막하여
길목 몇 마장마다 묻힌 그리움에도 채여 쩔뚝이며
지는 별에 부딪히며 다시 오래 걸어야 한다

 

 

 

-시집『물 속에 빈집』(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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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게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잖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날 몇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애기해보세그려.


 



―시집『조지훈 전집 1』. 나남.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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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애인



신표균


 


 


전혀 뜻밖에 내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예상치도 바라지도 않은 그가
짝사랑을 해왔는지
집시되어 떠돌다
손잡아 주는 이 하나 없자
나를 찜한 모양입니다
징그러워 온 몸 움츠리는데
그는 신이 나서
혈관타고 구석구석 헤집고 다니며
내 육체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조심조심 뜨는 밥숟가락에도 제 먼저 올라앉고
물 한 모금 과일 한 쪽 먹는데도
떨어질 줄 모릅니다
싫다고 싫다고 밀쳐내도
진드기처럼 붙어 다닙니다
심지어 잠자리에 들라치면
마누라 사이에 끼어들어 커튼을 칩니다
아! 이젠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어
받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며 쓰다듬고 보듬어
동반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당뇨애인


 


시집『어레미로 본 세상』(심상,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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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병

 
이화은

 


썩은 어금니를 치료하는데

마취제를 충분히 놓았으니 의사는

아프지 않을 거라고 한다

눈 감고 아

입 벌리고 있으면 그만인데

그만인데, 자꾸 눈물이 난다

아프냐고 의사는 몇 번인가 물었지만

아프지 않아도 눈물이 날 수 있다고

아 입 벌리고 있으니 말해줄 수가 없다

엄마는

아는 병은 무섭지 않다고 했다

썩은 어금니는 아는 병이다

오래 친한 병이다

너무 친해서 썩은 병이다

이 썩은, 우정 같은 병이

그 뿌리를 도려내며 내게

명분 하나를 슬쩍 쥐어준 것이다

자 이제 울어라

위패 같은 병 든 이빨 하나가

내 눈물의 물꼬를 틔워준 것이다

울어도 되는 명명백백한 처방을 받았으니

모르는 병 백 개 천 개를

아는 병 하나가 지금 다스리는 중이시다

 

 


-계간『시안』(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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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병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ㅡ 시집『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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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게

 

김제현

 


안다
안다
다리가 저리도록 기다리게 한 일
지쳐 쓰러진 네게 쓴 알약만 먹인 일 다 안다
오로지 곧은 뼈 하나로
견디어 왔음을


미안하다, 어두운 빗길에 한 짐 산을 지우고
쑥국새 울음까지 지운 일 미안하다
사랑에 빠져 사상에 빠져
무릎을 꿇게 한 일 미안하다


힘들어하는 네 모습 더는 볼 수가 없구나
너는 본시 자유의 몸이었나니 어디로든 가거라
가다가 더 갈 데가 없거든 하늘로 가거라

 

 


―시조집『백제의 돌』(열린시학 정형시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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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동물


내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파서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세 모녀가 생활고에 자살을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 하고

시를 써서 시집도 내고 문학상도 받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계간『발견』(201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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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병이 깊으면 

 

박남준  

 

 

먼산은 언제나 길 밖의 발길로 떠돌았으므로 상여처럼 돌아가는 길가,
등뼈 깊이 봄날이 사무쳐서 어지러운데, 두 눈에 장막은 일어 몸,
휘청이는데 얼마 만인가 마당 가득 풀들은 어느새 저토록 자라났는지,
나 먼 길 떠나고 사람 손길 닿지 않으면 이내 저 풀들,
어두운 내 방 방구들에도 솟아나겠지.

 

풀을 뽑는다.
한 포기의 풀을 뽑는 일도 마음대로 쉽지 않아서
모질게 다져먹지 않고는 손댈 수 없다.
쇠별꽃 봄맞이꽃 꽃마리 개미자리, 서럽다. 꽃들이 피어난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것은 조금 크고
어떤 것은, 보기에도 안쓰러우리만큼 작고 깨알 같지만
어느 것 하나 눈물나지 않은 것 없어 이 짓이 뭐람, 이 짓이 뭐야,
한 움큼 뽑았던 풀들 놓아 버리고
주저앉아 마음 처연한데, 앞숲인지 들려오는 너 두견,
울부짖느냐 무너져내리는 새소리.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창비,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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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성이 강한 병에 대한 처방전

 

 신미균

 

 

 

내가 뱉은 공기를

네가 마시고

네가 뱉은 공기를

그가 마시고

그가 뱉은 공기를

가위꼬리딱새가 마시고

가위꼬리딱새가 뱉은 공기를

푸른점박이비단능구렁이가 마시고

푸른점박이비단능구렁이가 뱉은 공기를

껄떼기가 마시고

껄떼기가 뱉은 공기를

모쟁이가 마시고

모쟁이가 뱉은 공기를

공기를

공기를

공기를

내가 마시면

안 됨

 

 

아무도 마시지 않았던 공기를

마셔야 함

 

 

―시집『맨홀과 토마토케첩』(천년의시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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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잊을 만하면 그대는 찾아와

내 생활의 안위와 평안에 시비를 건다

그대와 더불어 半生 살아오는 동안

위로는 짧았고 고뇌는 길었도다

지름길 버리고 우회의 생 살도록

끊임없이 허위 추궁하는 그대

나는 마음이 거처할 집

평생에 다 짓지 못할 것이다

권태에 친해져 아픔 없는 생이 견딜 만하면

그대는 찾아와 바람 부는 들녘,

흐느껴 우는 강을 보여준다

가혹한 운명의 주관자여 불안

비애만이 내 생의 온전한 재부임을 일깨우는,

빛보다는 어둠에 친화한 삶

다 살아낸 후에야 나를 떠날 그대

나는 오늘도 그대로 하여 큰도적이 되지 못하고

작은 슬픔 하나에도 위태로워져 크게 울고 있다


―시집『위대한 식사』(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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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에게


김윤희

 


비상처럼 고고한 약들도 어찌
밥이 필요치 않으리
집의 약장 속에서 도독고양이처럼
두 준 빛내며 숨죽이고 배고파하고 있는 암흑의 약들
너의 친절한 밥이 되어주겠다
이미 늙어버려 효능이 어떨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허리 디스크
최근의 관절염까지
나는 그리 싱싱한 먹이가 되지 않는 줄은 알지만
약 너에게 나를 바친다
뼈는 뼈대로 피는 피대로
내 모든 不良을 오늘은
통재로 너에게 먹인다
내가 앓고 있는 가장 나쁜
생각을 너에게 바친다
약이여 너의 끝없는 욕망 앞에 백기를 든다

 

 

 

- 일간『시가 있는 아침』(중아일보, 201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