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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모음 시 -진란/문인수/서규정/서정임/양해선/김윤자/복효근/조정 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8. 1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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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채석강에서

 

진란

 

 

그를 다시는 펼쳐보지 않으리라고
두텁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지 않았다


밀려왔다 푸르릉 피어나는 물거품도
서로 꼬리를 물고 사라지는 이무기의 꿈만 같아
수십리 밖으로 펼쳐진 모래톱에서는
해무가 시나브로 일어나나니


칠천만 년동안 아무도 펼치지 않았다는
이백의 서재를 엿보기나 하였다
선캄브리아대를 지켜온 할배도 눈웃음으로
천 탑을 쌓는 중이라고 했다


고서를 펼쳐보는 이 하나 없어도
갯벌을 뚫고 나온 달랑게들이 눈봉을 곧추세우고
따개비들도 푸른 바다를 꿈 꾸는 밤


1984년 그 해 가을의 해국은
지금도 책 갈피에 보랏빛 곱게 꽂혀있는지
희끗해진 꽃이파리 날근해져 날아가 버렸는지
차마, 아래 눌린 책을 꺼내 보지 못하고
바다를 꿈꾸는 밤이 무거워지는 생이다.

 


 
계간『주변인과시』 (2005,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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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문인수

 

 

채석강에 장서는 읽지 않아도 되겠다
긴 해안을 이룬 바위 벼랑에
격랑과 고요의 자국이 차곡차곡 쌓였는데
종種의 기원에서 소멸까지
하늘과 바다가 전폭 몸 섞는 일.
그 기쁨에 대해
지금도 계속 저술되고 있는 것인지
또 한 페이지 철썩, 거대한 수평선 넘어오는
책 찍어내는 소리가 여전히 광활하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작은 각다귀들
각다귀들의 분분한 흘레질에도
저 일망무제의 필치가 번듯한 배경으로 있다.
이 바닥 모를 깊이를 잴 수 있겠느냐
미친 듯 몸부림치며 헐뜯으며 울부짖는
사랑아, 옆으로 널어 오래 말리는
채석강엔 강이 없어서 이별 또한 없다.

 



현대문학상 수상시집『피어라, 석유!』(현대문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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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책, 다시 채석강


문인수 

                      

 

민박집 바람벽에 기대앉아 잠 오지 않는다.
밤마다 파도 소리가 자꾸 등 떠밀기 때문이다.
무너진 힘으로 이는 파도 소리는
넘겨도 넘겨도 다음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아 너라는 冊,


깜깜한 갈기의 이 무진장한 그리움.

 



정호승 지음『이 시를 가슴에 품는다』(램덤하우수코리아, 2006)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2』(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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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석강 스캔들

 

  서규정

 

 

  책은 옆구리로 읽는 것이다


  등뼈 부러지는 소리로 허리를 펴도 펼 소나무는 어기적어기적 한 뿌리는 이미 바다 쪽으로 던진 채석강을 찾아 가리, 길을 잡아주던 길잡이보다 길잡이를 끝낸 곳에서 허리 굽힌 동네머슴이 되리니


  엎드려 일만 하고서도 담배 한 개비면 충분한, 뽐뽐뽐 통통배 연기배 맞춰 해거름에 들어가면 고봉으로 밥상 차려놓고 부엌문 뒤로 살짝 숨은 손, 그 손은 달랑 한 장의 거친 겉장 같지만 더듬어 읽어갈수록 따뜻한 속살의 책을 온밤을 채워 거푸거푸 읽었듯이


  나 그렇게 채석강에 가면 옆구리로 읽어낸 한 사람이 억 만권 장서 속에 비릿하게 묻혀 있으리

 
 


시집 『참 잘 익은 무릎』(신생,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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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서정임

 

 

그동안 틈만 나면 떡살을 얹어 온

대를 잇는 떡집이다

 

비 오는 날 거대한 떡이 익어가는 김이 오른다

먼 백악기부터 공룡들과 따개비와

고속도로를 달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갯강구 같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시간을 사서 들고가는 저 오래된 떡집

 

떡이 익어가는 냄새를 맡는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를 읽는다

차마 멀리 썰물에 쓸려 보내지 못한 채

한 알 한 알 알갱이로 가슴에 박힌 사연을

켜켜이 쌓아둔

그리하여 끝끝내 변산반도(邊山半島)에서

떡시루에 김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그 뼈아픈 회한을 읽는다

 

두 팔 걷어 올리고

오늘도 거대한 시루에 떡살을 안치는

누군가의 손길이 바쁘다

 

 

 

시집도너츠가 구워지는 오후(문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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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彩石江)

 

양해선

    

 

뭍을 향한 그리움으로

부서져 온 파도

거품 물고 번번이 사그라져도

앞을 막아 선 암벽 향하여

온 몸 던져 부딪히는

포기할 수 없는 몸부림

 

맺힌 한() 허옇게 토해내며

목놓아 통곡한 나날

눈물 떨구어 쪼아 내고

한숨으로 엮어 낸 사연들

수만 권의 책에 담아

켜켜이 쌓아 올린

파란 바다의 꿈

 

바람도 지쳐 잦아드는 그날

행여 오려나

펼쳐 볼 소망 하나로

더욱 세차게 떠밀어도

쉼 없이 다가선다   


 

* 채석강(彩石江):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에 있는 해식절벽과 바닷가.

전북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된 경승지.

 

 

 

―『온글문학 제10(2010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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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김윤자

 

어느 선비가

서해안 끝자락 변산반도까지 와서

학문을 닦았단 말인가

들고 가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책들을

격포항 닭이봉 해변 언덕에

수북이 쌓아놓고 떠나갔음에

해풍과 세월이 켜켜이 다져놓은

초자연의 걸작품 앞에서

혹자는 시루떡을 쌓아올린 떡장바위라 부르고

혹자는 책장을 쌓아올린 책장바위라 부르고

절벽을 타고 흐르는 칼빛 바위림

집시의 날개로 솟아오르는 분무

당나라 이태백이 빠져죽은 강과 같아

채석강이라 부른다는데

달빛을 먹고 자란 뽀얀 속살이

생명의 빛으로 바다의 혼을 흡입하고 있다.

 

 

 

월간시와 글사랑(2007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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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편


복효근

 

 

서해 바닷가 채석강 암벽 한 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채석강 암벽이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옳다 누군가 눈이 참 밝구나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사내의 등을 기댄 그니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 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새길만한 가치가 있다면
사랑했다는 것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지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ㅡ시집 『마늘촛불 』(애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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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조정 


변산반도를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격포로 가는 길의 책갈피를 열어볼 때가 있다

뽕짝 메들리 왁자한 리어카에 기대어
서산서 온 노파는
고동 살을 받아먹으며 시부렁거렸다

앞 절만 부르소 앞 절만 부르소
청 좋은 내 아들 부르게 뒷 절은 냉개 두소

맥없이 부러진 이쑤시개를 주워들고
소금 한 주먹 삼키듯
개심사 명부전 주춧돌이 실하다고 했다

페이지가 낱낱이 암전인 바위를 옆으로 걸어가던
어린 게가
없는 강을 비추는 낮달의 이마에 손을 얹으면
황도십이궁 들고 나는
그리움이 칼 맞은 자리처럼 읽힐 때가 있다

 


―시집『이빌소 그림처럼』(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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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에


이창수



어디쯤에서 둥지를 잃어버렸을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혼곤한 꿈에 젖어 있을 무렵
낮은 굴뚝을 타고 들려오는
갈매기의 울음소리
손마디가 굵은 고압전선을 피해
저 깊고 먼 곳에서부터 나를 부른다
미처 봄이 오기 전 나를 떠났던
한 여자를 생각하며
지독히 춥기만 한 겨울바다로 나간다
서툴게 알았던 그 여자의 따뜻한 가슴과
눈동자를 기억하는 동안
등대의 흐린 불빛 사이로
검고 단단한 파도가 터질 듯 솟구친다
둥지 잃은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나를 버린 여자의 전부를 간직하고 있는
격포의 중심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어둠이 걷힐 무렵 벼랑 위에서
희망과 절망의 화물을 절반씩 실은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보인다
그러는 잠시 내가 걸어왔던 길들이
바다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착각이었을까, 그 모든 길 위에
촘촘히 뿌려 놓았던 성게알 같은 내 눈물
거대한 게로 자라
다시 바다로 되돌아오고 있다




―시집『물오리 사냥』(천년의시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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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 사만번의 망치질

 

  손택수

  

 

  땅, 땅, 땅, 파도가 절벽을 때린다 퇴적층이 일렁인다


  옛날 칼 만드는 대장장이는 녹은 쇳물을 꺾어 펴며 사만 번쯤 망치질을 했다. 쇠위에 수억 년 퇴적무늬를 만들었다. 저 바다 어디에 폐를 몸 밖으로 꺼내놓고 숨을 밀고 당기며 바람을 풀무질하던 사람들의 혼이 일렁이고 있다.


  살갗에 매달린 땀방울이 쇠속으로 스며들면 대장장이가 두드리는 건 철만이 아니었다. 고분 속 야철신의 우주를 통과한 운석의 섬광과 구만리 장천 멀고 먼 몸들을 유전

하는 물방울의 기억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은 스쳐 사라지지만 스치는 표면에서 살아나는 숨결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숨결이 저무는 바다 앞에서 지금 태어나고 있으니 해안을 향해 밀려, 밀려, 밀려오는

파도소리. 망치와 모루 사이에서 동백 꽃 멍울 터져나오는 소리.  땅, 땅, 땅, 땅을 두드리고 두드려라, 불똥이 살 속을 파고들면 내 몸 속으로도 천지가 흐르려니, 들러붙은 하늘과 땅이 가려운 딱지 속에서 새살로 돋아나려니


  원자들이 와글거리는 소리가 서해의 근육을 꿈틀거리게 한다. 노을에 젖은 채석강 층층마다 푸시시 푸시시 물보라가 일고 있다.

 

 


―월간『현대시』(201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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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강을 읽다


나혜경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지 한 권도 빼주지 않는

저 수만 권의 전집

한 권 슬쩍 하려다가 열 손가락 손톱 다 빠져버릴라

 

천년만년 정박 중인 비릿함과 무르익은 놀빛과 재탕 삼탕 글 읽는 바다의 소리로 엮었다니

그 이력이 참 새까맣다

 

좀약 한 알 쓰지 않고 멀쩡한

비 맞아 젖어도 못쓰게 된 적 없는

파도 떼의 몰매에도 무너진 적 없는

 

정정한 틈새 각주인 듯 삐죽, 풀꽃 한 송이 달려 있다

 

요철(凹凸)이 있어 점자책 같기도 하고,

그럼 마음 끝으로 더듬어 읽기라도 했단 말인가

펴 보지 않고도 저 책더미 앞에서 시구를 받아쓰는 사람

여럿 보았다

 

 

 

―시집『달팽이덩굴의 독법』(고요아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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