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고양이 시 모음 -이장희/황인숙/ 이소연/김상미/조용미/김충규/조은/김연아/고형렬/송찬호....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6. 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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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꿈


이장희

 

 

시내 위에 돌다리
다리 아래 버드나무
봄 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 고양이
곱다랗게 단장하고 빗겨 있소 울고 있소
기름진 꼬리를 쳐들고
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
푸른 고양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스르르 올라가
버들가지를 않고 버들가지를 흔들며
또 목놓아 웁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칼날이 은같이 번쩍이더니
푸른 고양이도 볼 수 없고
꽃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저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이 흘러 있소.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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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금성》3호(1924. 3)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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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황인숙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기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 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좇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ㅡ『1984년《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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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이소연

 

 

고양이는 제 울음을 빚어 수염을 자라게 했다

귓속이 텅 빌까봐 지붕 위에, 창가에, 골목에, 참새를 풀어놓기도 했다

 

발이 닿지 않는 공중을 두드리는 봄비도

사실은 고양이의 혼혈아

한번 쏟아진 것들은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고양이 발톱을 꽃잎이라고 부르자

바구니는 화분이 되었다

 

고양이 생각에 젖으면 모든 것이 너그러워진다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기분이 솟구친다

올 풀리기 시작하는 스웨터의 실로 남은

,

너무나 가벼워서 믿을 수 없는 봄,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나는 의자 옆을 생각할 수 없겠지

산책, 이런 건 빼앗기기 좋은 책 같겠지

 

그러니까 고양이는 나의 감정이고 기후이자 달력이다

도처에서 바람이 빳빳하게 자란다

고양이 바람이다

 

고양이 발자국으로 지붕을 만들고 싶은데

새와 구별되고 싶어 나는 네 개의 다리로

공중을 갸우뚱하게 딛는 야생을 거부했다

 

털이 계속자라니까, 난해한 나의 고양이

숙면을 위한 입 찢기를 자주하는 버릇이 생겼다

    


* 나가이 아키라의 영화제목

  

 

계간시와 경계(201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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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는 고양이

 

김상미

 

 

어디에나 고양이는 있다

4천만 년 전 화석에도 있고

우리 집 담벼락에도 있고

너와 헤어진 골목, 그 어둠 속에도 있다

 

고양이는 이미 태어나면서 진화가 끝난

더 이상 진화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동물

 

나는 어디에나 있는 고양이들이 좋다

울창한 숲속, 공동묘지 앞, 잡풀이 무성한 텅 빈 공장,

어느 유명 여배우의 침실, 잘 나가는 소설가의 서재,

천재 작곡가들의 음표, 안개 자욱한 부둣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이나 시집......

 

그곳이 어디든, 어디에 있든 고양이는,

고양이의 눈은 눈부시게 빛난다

 

신이 분노하고,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세상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도

모두가 사탄의 자식이라 돌팔매질을 하고

끈질긴 저주의 올가미가 평생을 따라다녀도

고양이는 개의치 않고 모두를 비웃듯

가장 아름다운 여신 프레이야의 마차를 끌던 악마고양이들처럼

유유히 제 갈 길을 간다

 

나는 어디에나 있는 그런 고양이들이 좋다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어도

언제나 살아 있는 심장에 불을 켜고

북쪽 창을 열면 그 아래에서 야옹!

서쪽 창을 열면 그 위에서 야옹!

 

세상 모든 장소의 혼령이기나 한 듯 그르렁거리며

어디서나 나타나고 어디에나 있는

그 도도하고 위협적인 카리스마!

누구도 완전히 소유한 적 없고 지배한 적 없는

, 놀라울 정도로 독립적이고 신비로운 고양이

 

나는 그 고양이들이 좋다

그 커다란 두 눈이, 靈氣 가득한 두 눈이

뚫어져라 나를 응시하거나

타오르듯 사납게 뒤돌아볼 때면 더욱더!

 

―계간​시와 표현(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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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의 고양이

 

조용미

   

 

이 도시의 유일한 고양이인 너는

조금 살이 쪘구나

수염이 무섭도록 자랐구나

나는 어찌하여 집과 먼 이 거리까지 산책을 오는 것이냐

오늘 밤은 너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나는 먼 나라에서 왔다

나는 폐사지의 탑처럼 그리움이 많다 슬픔은 더 많다

흉터도 많다, 너는 없구나

 

나무다리 아래에서 나를 기다린 거냐

이 다리를 건너 저 골목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꺾으면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나온다는 걸 너는 알고 있는 거냐

너는 내가 두렵지 않구나

내 안의 너와 같은 무엇을 보았구나

그런데 왜 자꾸 길을 막는 거냐

네 눈빛이 무얼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도시에서 고양이는 네가 처음이구나

죽은 자들에게도 마음이 있어

저 건너 편 바다의 묘지에서 뭐라고 너와 내게

자꾸 시비를 거는 것이 정녕 느껴지는 거냐

자정의 낡은 나무다리 위에서

나는 왜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냐

나는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

 

누구에게도 비밀을 발설하여서는 안 되는 거다

너는 다리 위의 고양이,

나는 다리를 조용히 지나가는 산책자

오늘은 네가 이야기를 청하기에

조금 더 많이 머물렀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거냐

오늘밤 우리는 다리 위에서

다정한 비밀을 나누어가졌다

 

 

 

―월간『현대문학』(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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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양이는 지금 어느 골목에 있을까


김충규

 


몇 해 전, 비 오는 어슬어슬 겨울 골목에서
몸은 떨고 있었으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던
그 고양이,
나는 몸은 안 떨었으나 눈빛은 흔들렸다


―너, 내 고양이 할래?
내가 했던 혼잣말,
사는 일에 좀 지쳐 있었던 내게
사람이 아닌 벗이 필요했는지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고양이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기만 해도
제 혀로 내 손등을 부드럽고 미세하게 핥아줄 것이다;
달팽이의 젖은 혀 같을 느낌,


―너, 내 고양이 할래?
내가 흔들리는 눈빛을 간신히 수습하며 바라볼 때
고양이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너, 내 사람 할래?
그 눈빛에 그런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내 앞에서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던,
그 고양이,
우리는 비에 젖어서
마를 사이도 없이 젖어서


(둘이…각자의 생활 영역을 벗어나 멀리 멀리 걸어가고 싶었다. 물론 고양이도 원한다면)


너는 네 혀로 내 손등을 핥든 안 핥든
나는 내 혀로 네 발등을 핥든 안 핥든
그리 한 번쯤 서로의 곁이 되어보고 싶었던,


지금, 어디 있니? 내 고양이

 

 

 

ㅡ계간『시향』(2009년 봄호)
ㅡ웹진 시인광장 선정『2009 올해의 좋은시 300選』(2009, 아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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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조은

 

 

고양이가 골목에서 마주친 나를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삶과 대면하는 듯

계속된 한파에 움츠러든 나는

머플러 속에 얼굴을 묻으며

고양이를 외면하고 걸었다

고양이는 찬바람이 부는 골목에서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렸던지

작심한 듯 나를 뒤쫓아왔다

내가 멈추면 따라 멈추고

걸으면 따라 걸었다

이상한 생각에 뒤돌아봤을 때

축 늘어진 젖무덤이 보였다

삶의 생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기막힌 암흑!

나는 집으로 달려가 밥솥을 열었다

 

 

 

일간그림과 가 있는 아침(서울신문. 2016-02-13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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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독서법


김연아

 


내가 아주 작고 어린 고양이였을 때

꽃들에게 다가가면 꽃들도 내게 다가왔죠


침대맡에 펼쳐진 책 위를 걸어 다니던 고양이

똥 묻은 분홍발바닥으로 데이지꽃을 찍어놓았다


당신의 책속에는 나비같은 말들이 있어요

나는 그 말들을 만지고 맛보아요

당신의 우아한 거짓말이 내 몸안에서 수정되어요


당신이 책이라 부르는 것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나는 당신의 해석에 만족할 수 없어요

잘못쓴 꽃들을 지우면서

나는 데이지를 데이지로 보았답니다


나에게 시간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공간이라고 말할 거예요

시간을 머금은 내 눈동자는

밤을 담은 수정구처럼 그윽하죠


내 생의 시작은 몽상의 시작

나는 토성의 달 아래 잠이 들고

금강의 이름을 지닌 당신의 경전을

아무 염려 없이 물어뜯어요


보랏빛 눈을 가진 데이지꽃이 자라는 소리

당신이 보고 싶어하던 여명이 이제 시작되려해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나를 바라봐요,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거스처럼


당신의 밤에서 태어난 그림자들

검은 새가 밤의 끝에서 노래를 하네

검은 새가 밤의 끝에서 노래를 하네

 

 


―월간『현대시학』(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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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에 올라간 고양이


고형렬

 


고양이 눈엔 햇살이 보인다

그 모양은 마귀 같다

고양이는 빛다발에 걸린다

몸을 기지개 켜며 지붕으로 날아가는,

벚나무 꽃가지는 환상

고양이에게 벚꽃은 없다


네 다리의 뼈가 건너뛴다

흰 공이 되었다 백지가 되었다

바람의 세상 쪽 추억이여, 야옹 하고

돌아보지만 나는 없다

 

 

 

―일간『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서울신문. 2013-07-20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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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온 저녁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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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고양이가 울 때

 

김승강

   

 

저 고양이는 내가 혼자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아침에 골목길을 막 돌아서는데

저 놈이 힐끔 나를 쳐다봤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어

고양이가 운다

아기 울음소리로

섧게 섧게

저 울음은 나 들으라는 소리가 분명하다

고양이 속에는 아기가 들어 있어서

태어나지 못한 내 아기가 들어 있어서

고양이 속에서 운다

태어나지 못한 내 아기가

나 들으라고 울고 있다

섧게 섧게

마을이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모두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무심한 듯 집안에서 가만히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

건넛집 남자가 딱 한번 고함을 꽥 지른 적이 있을 뿐이다

고양이가 섧게 우는 날은

내 아이가 우는 날

사람들이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다는 걸 나는 안다

잠들었던 자들은 잠에서 깨어나서

잠들지 않았던 자들은 아기가 저토록 섧게 울 수 있느냐 듯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저 울음소리는 나 들으라는 소리

 

 

 

―웹진『시인광장』(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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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고양이


박연준

 


들키고 싶었어요
지붕 위에 오래 앉아
지난 밤 꿈이 탈색되는걸 바라보았죠
눈이 가늘어지고, 수염이 팽팽히 서고
나는 점프에서 멀리
날아가는 상상도 못한 채
마음을 둥글게 말고 앉아있었죠
들키고 싶어서


전깃줄을 타고 건너다니는 봄,
비밀은 너무 가볍거나 무겁죠
몇 번 웃어버리고 나면 얇아져요


머리를 누르는 건 모자가 아니죠
견고한 빛의 무게,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
매일이 환한 낮잠 같아요
가끔 담벼락을 손으로 짚고
울며 가는 사람을 볼 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죠


이봐요, 이번 생의 그림에선
파란 바탕이 나예요
당신이 울고 지나간

 

 

 

-계간 『시산맥』(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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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걸어간다 


이영주

 


네가 너무 멀어서 나는 벽 뒤로 돌아간다

내 문장은 벽 뒤에서 시작되고


나는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교환원처럼

너에게 끈질긴 인사를 한다

 

얼마나 울었으면 등뒤를 깎아버렸을까

벼랑 속을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모든 죄는 눈빛에서 시작되었다

각자의 등짐 속에서 벼룩을 잡고 있는


그대의 울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누군가 비가 되지 못한 구름의 기억처럼

 

나를 자꾸만 부른다면

이 세상 밖으로 빨리 달리는 다리가 되고 싶은 밤


수화기를 들고 걷는다

네가 버리지 못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갈 자세로

외로운 자의 얼굴은 점점 길어진다

 

통곡이 쏟아지는 장마철에는

벽 뒤에 침묵을 새겨놓고 걷는다

 

등뼈가 젖는다

 

 

―계간『문학동네』(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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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을 앓는 고양이

 
이영주

 

 

내가 너무 멀어서 나는 벽 뒤로 돌아간다

내 문장은 벽 뒤에서 시작되고

 
나는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교환원처럼

너에게 끈질긴 인사를 한다

 
얼마나 울었으면 등 뒤를 깎아버렸을까

벼랑 속을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모든 죄는 눈빛에서 시작되었다

각자의 등짐 속에서 벼룩을 잡고 있는

 
그대의 울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누군가 비가 되지 못한 구름의 기억처럼

 
나를 자꾸만 부른다면

이 세상 밖으로 빨리 달리는 다리가 되고 싶은 밤

 
수화기를 들고 걷는다

네가 버리지 못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갈 자세로

 
외로운 자의 얼굴은 점점 길어진다

 
통곡이 쏟아지는 장마철에는

벽 뒤에 침묵을 새긴다 걷는다

 
등뼈가 젖는다

 

 


ㅡ시집『차가운 사탕들』(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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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자와 고양이
 

박이화

 

 

봄 한 번 안아 보실래요?

이제 막 겨울에서 젖 뗀

저 호기심 가득한 봄 한 번 안 키우실래요?

하루하루 몰라보게 쑥쑥 크는 어린 봄 어때요?

어느새 목련처럼 몽글몽글 젖멍울 부푸는

사춘기 봄 좀 보세요

감수성은 또 얼마나 예민한지

살구꽃 피는 첫 발자국 소리에도

봄비 같은 눈물 뚝, 뚝 흘리는

조숙한 봄 한번 보세요

그러나 주의하실 것은

하루 세 끼 아지랑이같이 모락모락 김 나는 사랑 주실 것

명심 또 명심하실 것은

잠시라도 한눈파는 사이

카르릉! 낯빛 바꾸며 토라진다는 것

그렇게 돌변한 봄은

철쭉처럼 붉고 쓰라린 손톱자국 남기고 떠나간 봄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변심한 여자와 집 나간 도둑고양이처럼!

 

 


―시집『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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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짐보


황병승

 

 

내가 갸르릉 거리면요,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요
내 이름은 짐보 나쁜 친구들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요 쥐는
옛날부터 싫었구요 이 골목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죠


세탁소집 아이는 미용사가 꿈이구요 열여덟에 결혼한 수리공 마키는
말할 때 눈을 찡긋거리는 버릇이 있고 대장장이 키다리는
아침부터 술이지요


내가 밤늦도록 갸르릉 거리면요,
당신이 천방지축 꼬마였을 때 내가 아프게 할퀸 적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해요 딴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시답잖은 얘기예요 고양이에게 왕국이니 전설이니……
당신들 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 내 이름은 짐보
지붕을 뛰어넘다 애꾸가 되었구요 동네 고양이들은 나를 점프왕 짐보
그렇게 놀리더군요 나쁜 마음을 먹을라치면 벌써 먹었죠
우리 고양이들은 칼날 같으니까요
그러나 눈이 꼭 두 개일 필요 있나요 친구들은 이 마을 저 마을
들쑤시고 다니지 못해 안달을 하지만, 많이 안다고
다 아는 건 아니죠 내 이름은 그냥 짐보 이 골목만큼은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죠


내가 만일 밤늦도록 갸르릉 거리면요,
당신은 아직 꼬마고 당신은 울고 싶은 일이 참 많고
그러나 그 모든 게 지난 밤, 짐보가 할퀴고 간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신들 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
딴 뜻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램덤하우스중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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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부가 된 고양이


  성윤석

 

    어물전 간판을 어부가 된 고양이,라 써놓은 가게가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그 근처로 배달 다닐 때마다 이 세상을 후려쳐 파출소 간 게 미안해서, 더 이상 술 얻어먹기 미안해서, 헤어진 여자 곁에 사는 게 미안해서, 반월동 마산 바다 반달 하나를 팔뚝에 문신하고 원양선 타러 간 사내가 생각났다. 나도 그 사내에게 미안한 일이 있었다. 같이 간다고 해놓고 안 갔다.

 

 


ㅡ시집『멍게』(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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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침대

 

  조혜정

 

 

 그 여자는 이제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깊은 밤 그 여자가 뒤척일 때 침대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낸다 그 여자는 방에 남아 있는 고양이들을 모두 쫓아내기로 결심한다
 

  핸드백 속 술 냄새 풍기는 고양이를 내보낸다 옆으로 쓰러진 하이힐 속 고양이를 내보낸다 의자 위에 냉큼 올라앉은 고양이를 내보낸다 피곤한 밤의 유리창에 달라붙은 젖은 고양이 속눈썹을 떼어낸다
 

  깊은 밤 그 여자는 침대를 옮겨 다니며 잠잔다 그 여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제모를 한다 종아리에 쉼 없이 돋아나는 고양이 털을 깎는다 그 여자는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은 거울을 다시 들여다본다
 

  아흔아홉의 남자가 거울 속 그 여자를 들여다보고 지나간다 아흔아홉의 남자가 지나간 거울 속에 그 여자가 홀로 남는다

 
  고양이는 이제 그 여자를 기르지 않는다 깊은 밤 침대가 뒤척일 때 그 여자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낸다 고양이들은 방에 남아 있는 그 여자를 쫓아내기로 결심한다

 

 

 

―계간『시와표현』(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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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고양이

 

  장선희

 


  하늘에서 가장 밝은 시리우스

  이집트인들은 그 별이 뜨면 새해 첫날이 시작된다 하였네

 

  오천 년 전, 쥐가 홍수처럼 불어나자

  파라오는 명령했네

  야생의 고양이를 키워라,


  신비한 눈빛의 이집트 고양이, 그 푸른 눈빛은 신성시 되었네 행복의 여신 바스테트, 고양이

와 암사자의 모습을 함께 가졌네 고양이의 긴 콧수염은 예민했지, 긴 울음소린 야릇했지

 

  파피루스를 주관한 하피신

  두루마리에 갑골문자 새겼네

  가난한 백성들은 돌판에 염원을 그렸네

  밤엔 오므려 쉬고 아침이면 가슴을 활짝 펴는 연꽃,

  돌에다 정성스레 새기네

  부활의 기대가 현세의 고단함을 치유했네

 

  거리의 아이들은 도마뱀과 놀고 사내들은 메추라기를 잡았네 초록색 공작석 가루 눈꺼풀에 바른 귀족남자, 거리를 활보하네 바다와 사막이 지켜주는 축복의 땅, 에티오피아 고원의 빗물 흘러흘러 나일 강은 흐르고 나일 강은 범람하고, 가축은 살찌고 보리와 밀은 아이처럼 자랐네]


   동쪽으로는 왕궁, 서쪽으로는 거대한 무덤
   

  대추야자 길 따라 낮잠에 달콤해진 이집트 고양이, 사람들 추앙 속에 털은 기름지고 갸름한 얼굴은 여신 바스테드를 닮아갔지
  
  파라오의 궁전,

  페르시아 캄비세스 왕이 공격했네

  성벽이 너무 높았네

  지나가는 고양이를 성벽 너머로 던졌네

  신성의 고양이 살리기 위해

  이집트 왕은 잠시 항복했다네 


  영혼불멸성에 현세의 삶을 모두 거는 사람들

  그 힘으로 후손이 번성했네

  파라오는 명령했네

  피라미드를 만들어 수호신을 기쁘게 하라,

 

  저승의 신 오시리스, 사후 세계를 관할하네

  심판의 날은 오고야 말지

 

  미라의 심장, 마아트 여신의 깃털보다 가벼워야 부활한다 했던가, 자칼의 머리를 한 아누비스 신만이 진실을 판단할 수 있었네 왕의 잠을 방해하는 자에게 죽음의 날개가 스치리라, 예언은 적중했고 왕들의 잠은 방해받았네 금항아리와 왕의 부장품, 카노푸스 단지 뚜껑의 자칼, 매, 개코원숭이 모양 장식, 도굴꾼에게 약탈당했네

 

  사막은 불멸의 궁전,

  황금빛 모래언덕 너머 엘 마르수스 산, 먹물을 흩뿌린 듯 차도르를 쓴 흑사막,
어느 새 삼천 년을 잠들었네

 

  파라오 궁전도 모래 속 고문헌이 되었네

  눈부신 털빛을 대신한 청동 고양이,

  영혼불멸을 증언하듯 박물관 앞에 서있네

  앞발 얌전히 모은 청동 꿈 속,

  딱정벌레 문양의 단잠에 새겨진 말

  영생을 믿는 자의 것이라 했던가,

  신의 반열에 오른 이집트 고양이

  가르릉 울음소리 추처럼 걸려있네

 

 


―웹진『시인광장』(201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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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고양이
 

이은봉

 
 

진제마을 늦은 밤 시간
쓰레기더미 뒤지다가
불쑥 튀어나와
가로등 불빛 속
주춤주춤 걸어가는 붉은 고양이,
이 밤 어디에도
제 붉은 마음
나눌 곳 없네
 

진제마을 오래된 골목
쓰레기더미 뒤져
썩은 생선 몇 점 뜯어먹고는
자동차 불빛 속
우적우적 걸어가는 붉은 고양이,
세상 어디에도
제 붉은 발길
향할 곳 없네
 

몸이 붉어 마음도 붉은
진제마을 붉은 고양이
사람들한테 버려지고서도
사람들 곁
끝내 떠나지 못해
여기저기 떠돌고 있네
들끓는 제 가슴
차마 어쩌지 못한 채.


 

 

-계간『서시』(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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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사진사

 

정진영

 

 

고양이가 무게도 없이

새를 향해 펄쩍, 뛰어오른다

 

애욕(愛慾)과 완벽히 일치했을 때

열리는 눈동자

 

초점을 한껏 당긴 순간

 

찰나에 허락된

시간의 틈새, 섬세하게 캡처하는 기쁨이란

 

새들 날아오르며 길을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 것

놀란 하늘이 슬쩍 열렸다 닫히는 것

허공 속으로 쏟아지던 햇빛 알갱이들

유리구슬처럼 튕겨지며 도로변 갈라진 틈으로

스며드는 것

 

, 저 햇빛 씨앗들

어둠 속에서도 다음 생은 연두라고

쉴 새 없이 땅속 말 밀어 올리는,

 

()의 파노라마를 찍는

무지개 고양이 눈,

 

시시각각, 환하다

 

 

계간시와 사상(2014.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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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꿈


이장희

 

 

시내 위에 돌다리
다리 아래 버드나무
봄 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 고양이
곱다랗게 단장하고 빗겨 있소 울고 있소
기름진 꼬리를 쳐들고
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
푸른 고양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스르르 올라가
버들가지를 않고 버들가지를 흔들며
또 목놓아 웁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칼날이 은같이 번쩍이더니
푸른 고양이도 볼 수 없고
꽃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저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이 흘러 있소.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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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핑크스 고양이


  최형심
 

 

  어느 神도 그를 위해 동사를 창조한 적이 없다. 바람의 호기심을 빌어
석상의 털 하나가 흔들린다. 수분이 없는 순결한 식탁을 준비하는 새벽,
포도밭에 자라난 붉은 허기가 그를 보고 있다. 모두가 빈틈에 몰두할 때
굳은 몸은 털을 놓아준다.  
 

  한 때 그는 거울을 보며 생각을 단장한 적이 있다. 자신의 까끌 거리
는 이름을 언제나 입 속에 넣고 다녔다. 갈기를 세운 봄볕엔 짧은 생각
으로 버텼다.

 

  먼지는 후일의 형체를 가지고 털은 전일의 형체를 가지고 있어 먼지
와 털은 같은 족속이다. 손발이 외면하는 그의 형체, 모든 털은 그 폐허
에서 자라고 빠진다.
 

  북쪽이 외등에 이르고 석상의 등뼈에서 채도가 풀리고 있는 중이다.
빈 란으로 남긴 어린 송곳니와 그림자를 품어본 적 없는 눈알을 가지
고 있는 그. 광장공포증에 걸린 활자들이 책을 이루고 곡선의 슬픔을
쟀다.

   
  함부로 길이 되는 무릎과 부드러운 기원이 없는 고양이가 서있다. 털
이 먼저 멸종된 무모종고양이가 털의 키를 늘리고 있다. 털은 자주 소름
으로 돌아간다. 사육할 수 없어 사랑하는 녹슨 첨탑 위, 어둠의 유통기한
이 다하고 있다.

 

 
 
-포엠스케어 두 번째 동인지『초록을 만나다』(책나무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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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금성》3호(1924. 3) 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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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고양이로다


권혁웅

 
 

   1

   봄날의 나무는 누구에게나 혀를 내미네 아랫도리를
가렸던 거적 치마를 벗어버리네 나무들이 그려내는 연
초록 春畵 어딘가에 一枝春心을 걸어놓고 싶네


   담벼락 사이엔 뱀풀이 만들어 놓은 길이 있지
   그 길은 폐허로 가는, 무성한 길이네
   블록담은 나무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여
   나무를 떠받치고 있네

 

  
   2

   골목 어귀에 대흥 복덕방, 노인들이 편을 나누어 楚漢
  志를 벌렸네 텅텅거리는 소리 요란하네 어떤 이는 싸우
다 지쳐 평상 위에 누웠네 봄 풍광이 펼쳐 놓은 빗살 무
늬 아래서 졸고 있네


   정오의 그늘이 몸을 바꿀 때
   그들도 봄 햇살 아래 꾸벅꾸벅
   풀려날 것이네

 


   3

   아스팔트 위 타이어가 그어놓은 일탈의 끝에서 바람
에 날리는 고양이털을 보았네 햇살의 이편과 저편이 솜
털 속에서 섞이네 압착된 육신을 벗어버린 껍질이 자유
롭네


   아이들이 분필로 그린 엄마 아빠는
   호박만한 머리통에 가느다란 팔과 다리,
   누구나 노인이네 그 애들이 끌고 간
   긴 줄의 끝에서
   거짓말처럼  金氏喪家 →50m를
   만나기도 하네

 

 

 

- 시집『황금나무 아래서』(문학세계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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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

 

홍일표

 

 

집주인의 양육법이 궁금하다

태생이 다른 농경과 유목의 혈통

방금 전 냉장고가 삼킨 것은

생선 몇 마리

그중 한 마리가 고양이 입속으로 들어간다

생선이나 육류를 좋아하는 식성이 닮았다

냉장고와 고양이는 아픈 기억 탓인지

긴 꼬리를 등 뒤에 감추고 산다

고양이는 주로 검정을 선호하고

냉장고는 주로 흰색을 선호한다

가끔은 서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하는 것이

그들의 습속이다

둘의 연애는 유구하다

본적과 취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고받는 눈빛이 뜨겁고 깊은,

몸속의 환하게 불을 켜고 사는 그들은

24시간 소등하지 않고

푸른 눈빛으로 어둠 위에 군림한다

냉장고 옆에 애첩처럼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둘은 함께 입양한 집주인의 귀가 유난히 길다

 

 

 

시집 매혹의 지도(문예중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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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

 

홍일표

 

 

집 주인의 양육법이 궁금하다

태생이 다른 농경과 유목의 혈통

방금 전 냉장고가 삼킨 것은

생선 몇 마리

그 중 한 마리가 고양이 입 속으로 들어간다

생선이나 육류를 좋아하는 식성이 닮았다

냉장고와 고양이는 아픈 기억 탓인지

긴 꼬리를 등 뒤에 감추고 산다

고양이는 주로 검정을 선호하고

냉장고는 주로 흰색을 선호한다

가끔은 서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하는 것이

그들의 습속이다

둘의 연애는 유구하다

본적과 취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고받는 눈빛이 뜨겁고 깊은,

몸속에 환하게 불을 켜고 사는 그들은

24시간 소등하지 않고

푸른 눈빛으로 어둠 위에 군림한다

냉장고 옆에 애첩처럼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가

집 주인의 커다란 귓속을 밤새도록 들락거린다



 

―계간시안(200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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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켜진 고양이

 

홍일표

 

 

고양이를 움직이는 것은 한 마리의 쥐도 아니고

쥐를 표절한 그림자도 아니다

고양이의 주린 배는 풍랑을 주식으로 한다

 

고양이는 파도나 해일쯤은 적당히 요리할 줄 안다

담벼락에서 뛰어내린 고양이는

오랫동안 바람의 낙법을 익힌 터라

바닥의 돌부리 정도는 몸이 먼저 널름 삼킨다

 

한때 말랑말랑한 구름으로 뒹굴다가

혼자 웅얼거리는 골목을 몸 안에 집어넣은 고양이

어둠의 심장을 두근거리며

눈 감지 못한 잉걸불 같은 눈으로 밤을 사냥한다

한순간 높은 담벼락이 구겨져서

고양이 발 앞에 납작 엎드린다

 

검은 고양이에게 사육된 밤이

제 몸의 어둠을 뜯어내며 걸어가는 새벽

 

볼펜 끝에서

누군가의 검고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계간『시에』(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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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다 보고 있다

 

김영석

 

 

고양이가 허공 속

어느 나라에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치 이 꿈속에서

저 꿈속으로 드나들 듯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는 허공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사는 이 세상에

어떻게 그놈이 홀연히 나타날 수 있는지

그것은 참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온 첩자인지

무엇을 염탐하러 소리 없이 다니는지

초상집 구석이나 무너진 폐가에

배롱나무 그늘 같은 데에

없는 듯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다

문득 돌아보면

어딘가 거기 앉아서

내내 조용히 우리를 보고 있는데

또 문득 돌아보면

거짓말처럼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새도 비행기도 허공 밖을 날 수밖에 없고

뜨고 지는 해와 달도

푸른 밤 별조차도

허공 속을 가리키는 표지일 뿐이어서

허공 속을 드나드는 길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데

하, 그놈은 귀신같이 나타나

언제 어디서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가 숨어 있지 않은 곳은

아무 데도 없다

푸나무에도 벌레에도 돌멩이에도

아니, 보이는 모든 것 속에

그놈이 숨어 서로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도 결국 우리 속에 숨어 있는

그놈의 눈을 통해 무엇인가 보고 있다

모든 것이 고양이의 눈이다

고양이가 다 보고 있다

 

 


―시집『고양이가 다 보고 있다』(천년의시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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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잠


김예강

 


꽃이라는 못에 나비가 걸렸다


세상모르고 잠자는 서랍


상자가 밀려나도 잠에 빠져있다 구름이라는 서랍


광합성이 필요한지 햇빛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자는


검은 나무 아래 검은 새들의 휘파람에 어스렁 어스렁 흐르고 싶은


구름이라는 서랍


매일매일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땅으로


걸어 들어가는 서랍


사막을 횡단하는 서랍

 

 


―계간『시와 세계』(2010년 가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 시 100選』(아인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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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고양이

최금진


혓바닥으로 붉은 장미를 피워 내고
조심조심 담장을 걷는
언어는 고양이
너에게 다가가 네 목을 물고 싶다
담장 위에 거꾸로 박힌 깨진 유리병들이
영롱하게 빛난다
지붕을 타넘으며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사람은 잔인하고 간사한 영물
만약 저들이 쳐 놓은 포획 틀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구름으로 변장하여 빠져나올 것이다
인생무상보다
더 쉽고 허무한 비유는 없으니
이 어둠을 넘어가면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달덩이가 있다
거기에 내가 들어가 눕는 꼭 맞는 둥지도 있다
인간에게 최초로 달을 선사한 건 고양이
비유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
흰 접시 위에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 올려놓는다
언어는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하늘로 달아나고
하늘은 흰 접시처럼 텅 빈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붕 위엔 고양이 한 마리
발톱으로 달덩이를 희롱한다
붉은 발톱 달린 장미꽃이 활짝 피어난다



—계간『문예바다』(201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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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고양이

유병록


자, 걷자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축하는 의미로
까만 구두를 신고

정오의 세계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지붕 위를 걷자
불빛을 걷어차면서

빛이란 얼마나 오래된 생선인가

친절한 어둠은 질문이 없고
발자국은 남지 않을 테니

활보하자
밤의 일원이 된 걸 자책하는 의미로
까만 구두를 신고
이 세계를 조문하는 기분으로



ㅡ시집『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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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의 춤

 

  김미정

 

 

  피아노에 앉는다

  불충분한 장갑을 끼고

 

  누군가 건반을 마구 두드린다 계단이 엉망이 된다 못갖춘마디의 웃음이 손가락 끝으로 흘러내리는 날, 7옥타브의 악보가 그려지고 멜로디가 조금씩 자란다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때 두 팔을 벌려 안을 수 없는 꽃다발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사라지는 내일은 뜨거운 춤과 닮았을까 당신과 나 사이 고양이의 발자국이 놓여있다 그 음만 세게 치는 스타카토 같은

 

  흰 계단이 검은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좋은시 2015』(2015,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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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똥


강영환

 

 

길고양이가 잔디밭에 똥을 누고 갔다

모시나비 한 마리가 검은 똥 위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폈다하며 먹고 있다

험악한 짐승이 다가서도 돌아갈 줄 몰랐다

지렁이가 굵은 몸을 풀 아래 누이고

검은 고양이똥을 노리다 나비에게 들켰는지

똥 속에 머리를 반쯤 파묻고 울었다

 

비 그친 산록에 피어난 안개가

똥을 감추기 위해 슬렁거리며

빈 마을에 내려서고 있을 즈음

나비가 먹고 남긴 똥막대는

작은 벌레들이 다 들고 가서 그만

부스러기로 남은 모래알 등껍데기로

길고양이 발자국을 지우고 있다

  

 

 

ㅡ『좋은시 2015』(2015, 삶과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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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화되지 못한 고양이

 

김경선 

 

 

발톱은 무디고 늘 졸린 눈이지요.

몰래 아파트 담벼락을 타려다

걸핏하면 중심을 잃고

가끔은 쥐에게도 물리곤 하지요

동료 고양이들

몸치에 눈치코치도 없다고 비아냥거리죠.

 
하루는 도시 친구가

인사동 한정식 집에 초대를 했어요.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발톱을 다듬고

꼬르륵 배를 달래며 전철을 타고 달려갔어요.

메뉴판을 보고 순간 당황했어요.

수라상, 정승상, 대감상, 양반상 

누군가 할퀴고 싶었어요

그 많은 밥상 중에 내 상은 없었지요.

 

생선이 오른 백반을 먹으려면

별수 없이 양반상을 받아야 했지요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얼굴이 화끈거렸지요

가끔 은신처를 기억하지 못하는

옆집 생쥐가 부럽긴 처음이에요

 

미끄러지듯 날아오는 눈초리

그들의 말은 치명적이지요

내 품종에 대해 고백하라 다그치지요

조상 중에 나 같은 고양이는 없다며

나의 혈통을 의심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잡종으로 낙인찍혔죠.

  

 

ㅡ월간『우리시』(200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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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마술 

 

최종천 

 

 

우리 공장 고양이는 마술을 잘한다.

어떻게 암컷을 만났는지 그리고 역시나

도대체 어떻게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는지

네 마리는 엄마를, 다른 네 마리는 아빠를,

정확하게 닮았다. 밥집에서 밥도 오지 않았는데

일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

그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우리들 배가 고파온다.

녀석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니야옹! 하는 소리로 온 것이다.

땅바닥에 엎질러준 생선 대가리와 밥을 말끔히도 치웠다.

얼마 후엔 암컷도 같이 왔다.

공장장만 빼고는 일하는 사람 모두 장가를 못 간

노총각들이어서 그런지 고양이 사랑이 엄청 크다.

자본주의가 결혼하라고 할 때까지

부지런히 돈을 모으는 상중이가 밥 당번이다.

밥을 주면 수컷이 양보한다.

공장장은 한때 사업을 하다 안 되어

이혼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본주의가 헤어지라고 하여

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사람의 새끼를 보면 한숨만 터지는데

고양이의 새끼를 보면 은근히 후회되는 것이다.

사람인 나는 못하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고양이의 마술이다.

 



시집 『고양이의 마술』(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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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있는 골목

김양희


고양이가 서러운 꽃처럼 앉아 있다
구급차가 골목의 고요를 깨트리고 떠난 후
저녁의 가로등 켜지는 느린 풍경을
바라보는 눈빛이 슬프다
골목 입구에서 시작되는 불빛은
흐릿한 발자국으로 건너와
고양이가 앉아 있는 낡은 철대문 담장을 넘는다
불이 켜지지 않은 마당에는 옷가지 몇 점
빨랫줄에 걸려 시들어가고 있다
아프지 마라 아프면 서럽다
나 없어도 울지 마라
늙음도 한철인데 철 지나면 꽃 지듯 가야지
큰길 건너 높이 반짝이는 교회당 십자가
조등을 걸려는 듯 무거운 기척으로 내려오고
낡은 골목의 남루를 씻어내는 비가 추적거린다
고양이는 비를 맞다가 문득 생각난 듯
휙 담장 위로 올라서서 빨랫줄을 향해 야옹거린다
그 울음 그치지 않는다
새벽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 쿵쿵 울리며 지날 때까지


ㅡ시집『서귀포 남주서점』(한국문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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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의 고양이

 

  이강

    

 

   콘크리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햇살 부스러기가 던져지던 그 순간 너는 왜 웅크리고 있었을까, 아직 어리고 보드러운 털이 허공을 향해 있다 갈비뼈는 침몰하여 한쪽 등이 바닥을 향해 있다 침몰한 갈비뼈가 웅덩이가 되었다

 

   우물처럼,

 

   거기 햇빛이 고이고 바람이 고이고 온갖 소리들이 고이고 너의 어둠이 고이고 너의 몸을 감싸고 있던 양수가 고인 채

 

   웅덩이는 지금 엄마의 자궁처럼 따뜻하다 지나가던 바람이 털들을 어루만지듯 흔들고 있다

 

    

 

계간 문예바다(201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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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손진은


 

, 그 시절 우리 안방 옷장엔

고양이 몇 마리 살고 있었더랬다

그 곁엔 눈초리 또렷한 몇몇 소녀들도


어머니의 손끝에서 태어난 그이들은

대낮의 분주에서 돌아와

밤이면 그곳으로 스며들곤 했던 것이다


옷장 속에서 살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는

내 일기장에도

때론 새벽 내 꿈속에도 옮아붙었다


내 다정한 친구, 이 명상가들은 그러나

밥상에 올라앉거나

그릇을 뒤집진 않았다


헐렁한 시절, 자주 빠지던 가난의 늪

가끔씩 출몰하던 악어떼에 물어뜯긴

뒤꿈치, 그 휑한 구멍을


어머니는 꽝꽝한 겨울의 한 가운데서

헝겊이나 스웨터 자락에 가녀린 바늘로

고양이, 눈매 이쁜 소녀를 양말의 뒤꿈치에

봄을 부르는 노래와 함께 깃들게 했더랬는데


그 시절의 고양이와 소녀들은

이야기를 짜던 작가가 먼 길 가시고도

내 기억의 서랍 속 불씨

꺼지지 않는 불씨를 물어물어

봄은 온단다, 봄이 오면 뭐할 건데

때로는 말간 눈동자로 속삭이다

이젠 완연한 봄이잖아, 중년 가장 튀어나온 뱃속을 향해

짐짓 어깃장을 놓기도 하는데

 

 

 

격월간 『시사사 (2017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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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하세요? 고양이에 꽂힌 한국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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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토종 고양이는 길고양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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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나에게 머리를 내어준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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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좋아하면 진보.. 개 좋아하면 보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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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 (16) 길고양이를 위한 변명 주인에게 버림받은 고양이 자존심 강해 매달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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