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와불
권정우
천 개의 부처가
뿔뿔이 흩어져버린 뒤에도
나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테지만…
당신 곁에
또다시 천년을 누워 있어도
손 한번 잡아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천 개의 석탑이
다시 바위로 들어가 버린 뒤에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겠지만…
내가 당신 곁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 모르는 당신은
다시 천 년이 지나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테지만…
―월간『유심』(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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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불臥佛
신현정
나 운주사에 가서 와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 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와불이 누으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 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고 무심코 내찼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년 내놓으시라
천년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시집『바보 사막』(램덤하우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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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와불
임영조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키 크고 마음 착한 미남 석공과 키 작지만 요염한 공주가 한가윗날 밤 우연히 서로 눈이 맞아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유부남 유부녀라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사랑이 날로 깊어질수록 한편 괴로워했다 허나 그들은 마침내 야반도주를 모의하고 배 한 척을 마련하려 백방으로 뛰었다 하늘도 그 애틋한 순애에 감복하여 이 세상 아닌 딴 세상에 가서 행복하게 살라고 구름배 한 척을 내려주었다
그들은 사랑에 부푼 돛을 올리고 세상 밖으로 밤낮없이 노를 저었다 그러다 비바람 몰아치던 칠석날 저녁 그들의 배는 북두칠성 모서리에 부딪쳐 화순군 도암 들녘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들의 육신과 배의 잔해는 땅에 떨어지면서 크고 작은 바위로 굳어 도처에 널려졌다 하늘은 덫으로 놓아둔 북두칠성에 좌초된 것을 못내 가엾게 여겨 칠석날 저녁이면 일곱 별을 내려 곡하게 하고 비를 뿌렸다 그리고 천상의 석공들을 내려 보내 백일 동안 밤도와 그들의 석상을 세우게 하고 배의 잔해로 천불천탑을 완성하라 명했다
드디어 완성된 석상을 막 세우려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새벽닭이 울었다 그 소리에 놀란 석공들은 그만 서둘러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운주사 영구산 마루 양지녘에는 그 석공과 공주가 금실 좋은 와불로 누워 세상 밖으로 갈 구름배 한 척 기다리고 있다 곧 나란히 일어날 듯 하체 약간 비스듬히 쳐든 채
치정도 지극하면 성불하는가?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5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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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와불
김신예
나는 집 없는 피안의 와불
산중에 바람소리 벗삼아
득도한 몸이라
여기 누워 천년을 산다 한들
무슨 근심 있으랴
새처럼 훨훨 삼라만상 떠돌다
등 붙이면 거기가 하룻밤 거쳐
이승의 탐할 것 무엇인가
해탈에 이른 자는
한 줄기 햇살조차 밟지 않는 법
약하고 어리석기가
사람보다 더한 것 무엇이던가
저기 산 아래 석불을 보라
팔 하나 잘라 개울에 던져 넣고
머리도 떼어 길 위에 버려 두니
왜냐고 누가 묻거든
무슨 말을 해주랴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뿐
시집『히잡 쓴 여자』(시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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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돌부처님께 말 걸기
김창완
어느 별에서 망명 온 난민인지요
온몸 가득 마마 자국 더께 진 몰골에
집도 절도 없이 노숙자로 사시는
영구산(靈龜山) 운주사(雲住寺) 돌부처님들
왜 하필이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이 막돼먹은 세상에 오셨는지요
아낙네가 코 떼어 속곳 속에 감춰도
없어도 없지 않고 있어도 있지 않으니
숨 쉬지 않고도 영겁으로 가시며
아등바등 사는 이들 깨진 꿈 주워
개떡탑 거지탑 요강탑 쌓아 놓고
어느 새 내 맘속에 기척 없이 들어와
탐욕 덩어리 모아 돌탑 천 기 쌓더니
지쳐 널브러진 우리 삶의 너럭바위에
마마 자국처럼 천문도 쪼아 놓고
그 위에 누워 밤낮으로 하늘만 보면서
왜 혼자 빙그레 웃는지요
혹시 고향 별이라도 찾았는지요
아니면 여기가 극락인 걸 깨달았는지요
ㅡ월간『유심』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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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에서
허형만
운주사에 오면
눕고 싶다
저 와불처럼 나도 누워서
한쪽 팔 턱에 괴고
세상사 지그시, 두 눈 깔고
그만큼만 보거나
아예 몸도 생각도
다 비운 채
허청허청 시린 별로
흐르거나.
―시집『영혼의 눈』(문학과사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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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함민복
비 내려
와불의 눈에 빗물 고인다
내 아픔이 아닌
세상의 아픔에 젖을 수 있어
내리는 비도
눈물이구나
그렇게, 다 그렇게 되어
세상에
눈물의 강 흐르면
그 위를
마음 배들
구름처럼 평화롭게
떠갈 수 있다는 설법인가
북두칠성 낮게 끌어내린 뜻도 알 듯한
―월간『문학사상』(200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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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이재무
다 늦은 봄날, 눈은 내려서
길도 마음도 젖은 흙이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부질없고 아득해져서
생각의 배 맞는 지기 몇 더불어
운주사 가니
큰 배 한 척 산중에 정박중인데
크고 작은 선실마다에
성도 이름도 없이 촌부들 저희끼리
누워 혹은 기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어디서 메주 뜨는 내음 솔솔 풍기고
점심 거른 배 하도나 출출하여
통성명 없이 情人된 절간 속 장삼이사들
데불고 가서 추어탕 한 그릇
탁주 한 발로 요기와 한기 풀며
거하게 취해 천 년을 살다 오는 길
마음도 길도 미풍에 날려
볼에 와 닿는,
춥지 않은 춘설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달빛 받은 창호지같이
환하고 까닭없이 그저 고맙고
―시집『푸른 고집』(천년의시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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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와불
조성국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걷고 있는 거다 저문 하늘에
빛나는 북극성 좌표 삼아
천지간을 사분사분 밟으며 오르고 있다
등명(燈明)의 눈빛 치켜뜬 연인과
나란히 맞댄 어깻죽지가 욱신거리도록
이 세상 짊어지고
저 광활한 우주로 내딛는 중이다
무릇 당신도 등짐 속의 한 짐!
―시집『슬그머니』(실천문학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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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칠성바위
김정임
산골짜기 깊숙이 북두칠성을 더듬어 갔다
천체의 궤도를 따라 만들어진 동그라미는 호루스의 눈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별의 형상으로 빚어진 거대한 돌덩이를 높은 산으로 옮긴 일은 신의 계산법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오르내리는 빗줄기 뿐, 너무 고요해 낯선 은하계에 혼자 떨어진 것 같다
먹구름 사이 작은 새가 죽을힘 다해 퍼덕이고 별의 자장은 세상 밖으로 빠르게 나를 밀어냈다 우리는 어느 별을 통과하는 중일까
바람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르는 동안 꾹 다문 입술로 지웠을 옛 사람의 기도, 목이 메이는 수많은 기도를 새겨놓고 떠난 자리는 수백 년 동안 쓸쓸한 미래처럼 비어 있다
남쪽 골짜기에 천근의 고독을 완성하고 흔적 없이 사라진 사람들, 두려움에 쫓기다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없는 사람의 이름을 낮게 불러보았다 너무 캄캄해서 사라진 길들, 살다 벗어던진 무거운 별자리가 신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계간『애지』(2011.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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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김춘
코가 없는 미륵
눈이 없는 미륵
눈 코 입이 없는 미륵
머리가 없는 미륵
머리만 있는 미륵
생각이 너무 깊다.
티끌만한 생각을
탑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는다.
―시집 『불량한 시각』(리토피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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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나 위로 올라간 부처님
강준철
부처님이 법당이 답답하여
안마당을 거닐다가
물 한바가지를 마시고
안테나 위로 날아 올라갔다
수만 가정의 안방으로 부처님이 송신되었다. 그러나
전파 장애로 아무도 부처님을 보지 못했다
갈참나무에 올라가 목이 아프게 노래하던 부처님이
방송국으로 날아가 새로운 버전으로 노래를 불렀으나
이날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T.V 수상기 고장으로 보지 못했다
이튿날 조간신문 톱기사에
"보지 못한 시청자들은 www.kbs.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서특필 되었다
목을 길게 빼고 부처님이 슬금슬금
내 방문 안으로 기어 왔다
그 때 전화가 왔다
"우체국입니다. 댁으로 택배된 부처님이 반송되었습니다.
확인하시려면 2번을 누르세요!"
점심 때 국수를 맛있게 먹은 부처님이
민들레 홀씨를 타고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들어가 이메일로 송신되었다
대부분 전송 실패로 되돌아 왔다
한사코 고개를 가로 젓던 부처님이
나무에서 추락하여
석간신문으로 배달되었는데
중생들이 광고인 줄 알고 휴지통에 버렸다
―시집 『부처님, 안테나 위로 올라가다』(미네르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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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 부처님
여한경
그까짓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팔공산 관봉(冠峯) 정수리에
높이 홀로 앉아서도
눈시울 내리깔고는
아래로만 내려보는 부처님
구름처럼
벌떼처럼
하늘마당에 모인 사람들
촛불 연등 밝혀놓고
축원 염불 밤낮으로 시끄럽지만
모두를 굽어보며
모두를 헤아리며
광명(光明)으로 이끄시는 부처님
하늘보다
드높아만 보이시네.
―시집『달빛 인터뷰』(시문학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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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당만부당 부처님
이홍섭
연꽃등 허방을 밝히고 가는 도심 포교당 경내
여래는 법당에 좌정해 계시고
아내는 시장통에 장 보러 가고
세 살배기 아이는 좋아라 절 마당을 뛰어다니는데
합장을 올리며 절에 들어서던 노보살님이
천방지축 뛰어노는 아이를 보며 미소 지으시더니
천부당만부당하지, 암 천부당만부당해 하며 지나가신다
며칠 뒤면 여래께서 이 사바에 오신 날
아이는 잔디밭에 들어가 민들레를 따는데
노보살님은 어쩌자고 천부당만부당 하셨을까
노란 민들레를 손에 꼭 쥔 아이를 품에 안고
연꽃등 너머 여래를 보는데
여래는 노보살님의 천부당만부당을 들으셨는지
그 큰 귀를 늘어뜨리고는 말없이 눈을 감으시고
천부당만부당한 삶을 살아온 늙은 애비도
내가 모르는 삶을 살아갈 이 여린 아이에게만큼은
천부당만부당한 일들이 일어나질 않기를
또한 간절히, 간절히 빌어보느니
―시집『터미널』(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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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패설
임영조
법당 앞 돌계단 사이에 두고
어린 동백 두 그루 마주 서 있다
새파란 잎들이 공양 받은 햇살을
키질하듯 살랑살랑 까분다, 금세
분분한 소문 같은 금빛 가루 부시다
그 무슨 법문을 주고받기에
온통 벌개진 낯으로 키들거릴까
얼마나 솔깃하고 귓맛이 나면
노란 목젖이 다 보이도록
꽃술을 활짝 열고 자지러질까
용맹 정진하라, 땡그렁!
아니면 파계하라, 땡그렁!
부연 끝 풍경이 수시로 경을 쳐도
동백꽃은 한사코 입 다물 줄 모른다
참 농후하고 불경스러운 수작을
불당에서 내내 내려다보는
부처님도 손들고 조용하시다
저 철없이 고운 사미들 돌연
옷 벗고 정말 파계하면 어쩌나
절 버리고 혹 내게 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가슴 설레는
볼수록 낯뜨겁고 황홀한
동백꽃 패설.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제6시집)』(천년의 시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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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부처님
김애리나
쉿, 부처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햇살이 부처님의 이마에 키스하고파
법당 안을 기웃대는 봄날이었지요
졸립지요 부처님? 그래도 봄인데
나들이는 못 갈망정 마당 가득 피어난 꽃나무 좀 보세요
산사나무 조팝나무 매자나무 꽃들이 치마를 올리고
벌서 바람을 올라탈 준비를 하는 걸요
꽃가루 가득 실은 바람과 공중에서 한바탕 구르다
주워 입지 못하고, 흘린 치마들이 노랗게 땅을 수놓는 걸요
화나셨어요 부처님? 왜 오롯이 눈은 내리깔고 침묵하세요
이 봄에 관계하지 못한 生이란 울기만 하는걸요
보세요, 대웅전 계단 옆 고개 숙인 한 그루의 불두화를
향기 많은 꽃에 벌과 나비가 꾜여 열매를 맺는 모습은
수도승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여 성불코자 심었다는 불두화가
관계를 나누다 쓰러진 것들을 보며, 눈물을 찍어내고 있어요
천년이 넘게 한 세상 굽어만 보시는 부처님
오늘처럼 법당에 둘이만 있는 날에는
당신 한번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 아시는지,
헛, 헛 기침하시네요 토라져 눈감으시네요
긴 손 뻗어 몇 날 며칠 불두화의 눈 감겨 주시니
아, 그제야 봄 저무네요 절름발로 지나가네요
―신춘문예『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작』(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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