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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 시 모음 -김선우/오세영/박미라/강희안/김신용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5. 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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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

김선우



암자의 겨울 아침은 난생(卵生)설화로부터 시작된다
계곡 아랫녘엔 노(老)보살의 빨래 방망이질 소리,
푸른 강보에 싸인 갓 낳은 알 하나가
목젖 부은 뻐꾹새 울음으로 지상에 내려온다
남의 둥지에 슬픔 한 알을 낳아 놓는 순간이
한겨울에도 부득불 얼음장을 깨고 앉은
노(老)보살의 목쉰 빨래 방망이질 소리로 쏟아진다
남의 알을 물어올 수밖에 없었던 자의 치욕이
가진 것 없는 어미의 단단한 슬픔이
타악, 타악, 후려치는 방망이질 소리로
일주문을 바깥이 시퍼렇다

찬 돌 위에 쪼그려 우는 뻐꾹새 울음 듣는다



* 탁란 : 조류가 다른 조류의 둥지에 알을 맡기는 일.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창비,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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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托卵

 

오세영

 

 

양지바른 벌판

아늑한 둔덕에 쪼그리고 앉아

산은 오늘도

무덤들 몇 개를 품고 있다.

밖엔 겨울바람 매섭지만

포근하게 깃털로 감싼 가슴의 온기는

항상 따스하다.

언제 껍질을 깨고 나올까

그 알들...

산은 지상에 내려앉은

우주의 새,

품은 알 아직 부화할 기미가 없어

오늘도 날기를 포기한다.

 

 

 

시집 『밤 하늘의 바둑판』(서정시학,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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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란(托卵 

 

박미라  

 

 

가끔씩 작은 새가 포로롱 날아가기도 한다는

베이비박스*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베이비박스를 수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어쩌면, 망치를 만들거나 기계톱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부수고 자르고 휘두르다가

제 이마를 때릴지도 모른다

상처가 생기고, 아물고, 다시 생기다가 문득,

꽃들은 어디서 피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낮달이 뜨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개와 늑대의 시간을 지나갈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다음 생이나 믿어보자고

제가 제 머리를 쓰다듬다가

사실은 뻐꾸기*가 가엾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별별 종류의 사무침이 있다지만

 

탁란(托卵)이라니!

그대가 이 기괴한 벌칙을 만들었다면

부디 조심하시라

빗장뼈 아래를 움켜쥔 누군가가

신의 거처를 묻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 사정상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된 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상자. 200912월 서울 주사랑공동체교회의 이종락 목사가 처음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 스스로 둥지를 틀지 않고 붉은눈오목눈이 등의 둥지에 알을 낳아 탁란(托卵)을 한다.

 

    

 

계간시와 경계(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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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의 탁란 

강희안 



저 흉악한 오리는 대체
몇 개의 알이나 닭의 둥지에 숨겨놓은 걸까
까끌까끌한 보리 모개를 먹었는지
오리들이 꽤액 꽥 숨넘어가고 있다
둥근 주둥이를 벌리며 목청을 세우고 있다
가끔씩 닭의 문간에선
병아리의 부화가 시작되었는지
콕콕콕, 생명의 코크를 여는 소리, 소리...
게슴츠레 눈을 뜬 병아리들이
일제히 희디흰 부리를 치켜들고 있다
그놈들은 빛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므로
누구도 애써 눈을 감지 않는 것이다
잠시 눈꺼풀에 걸려 있던 졸음이
세계를 한번 기우뚱거리게 했을 뿐이다
스스로 진공의 주검을 깨뜨린 자만이
온전한 몸을 얻을 수 있는 법
오리들이 구룩구룩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금단의 영역을 기웃대자
어미닭이 날카로운 부리로 go! gogogo!
저리 썩 물러나라고
잠시나마 서슬 붉은 눈을 부라렸던가
저리도 여린 발길질에
끄덕끄덕 당찬 계관마저 조아렸던가
어미닭이 두꺼운 오리알을 쪼아대는 사이
그들은 그간 열심히 부풀린 부리로
차디찬 어둠을 베어 물 것이다
어미를 잃은 기억은
다시금 누군가의 부재로 대체될 것이다
새로 물려받은 넓적한 부리조차
곧 제 몸을 불리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계간『시평』(2005년 여름호)

시집오리의 탁란(2016,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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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변주)

 

김신용

 


뻐꾸기 둥지는, 사람의 귀네

귓속의 달팽이관을 오므려 조그만 둥지를 만들어 주는,

그 둥지에서 태어난 새끼가, 다른 알들은

모두 둥지 바깥으로 떨어트려 버리고는, 끈질기게

울음의 핏줄을 이어주는, 귀네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시침 뚝 떼고 있는

없는, 그 뻐꾸기 둥지를 옮겨와, 귓속에

가만히 둥지를 모아 주는, 동그마한 귓바퀴

일생 동안 집을 짓지 않으니,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야 하는

천형 같은 탁란의 생을, 마치 포란이듯 품어 주는

부드러운 귓바퀴,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일생을

죄의식도 없이 견뎌야 하는, 생을

제 집이듯 데려와, 슬픈 모습 그대로 살게 하는

없는, 뻐꾸기의 둥지는

사람의

귀네

 

 


 『문장웹진』(2011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