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
이병기
1
한 손에 책(冊)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앉아 책(冊)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시집『난초』(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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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꽃
이병기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
지난 봄 피는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현대문학》(1953. 3)수록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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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가자
이병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 데나 정들면 못 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 봅시다.
삼베 무명 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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