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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시 편들 -정한모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2. 1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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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에서

 

정한모

 

 

1. 내 가슴 위에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정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의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싸늘히
앉힌다

 

2. 남루한 기폭


  바람은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어 올리면서 일어났을 것이다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들고 새벽이슬 잠 포근한 아가의 가는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어났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제비의 비상처럼 날아온 날신한 놈과 숲 속에서 빠져나온 다람쥐 같은 재빠른 놈과 깊은 산골짝 동굴에서 부스스 몸을 털고 일어나온 짐승 같은 놈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그러나 언제든 하나의 체온과 하나의 방향과 하나의 의지만을 생명하면서 나뭇가지에 더운 입김으로 꽃을 피우고 머루 넝쿨에 머루를 익게 하고 은행잎 물들이는 가을을 실어온다 솔잎에선 솔잎소리 갈대숲에선 갈대잎소리로 울며 나무에선 나무소리 쇠에선 쇠소리로 음향하면서 무너진 벽을 지나 무너진 포대 어두운 묘지를 지나서 골목을 돌고 도시의 지붕들을 넘어서 들에 나가 들의 마음으로 펄럭이고 산에 올라 산처럼 오연히 포효하면 고함소리는 하늘에 솟고 노호는 탄도(彈道)를 따라 날은다
  그 우람한 자락으로 하늘을 덮고 들판에서 또한 산정에서 몰아치고 부딪쳐 부서지던 그 분노와 격정의 포효가 지나간 뒤 무엇이 남아 있는가
  다시 푸른 하늘뿐 외연한 산악일 뿐 바다일 뿐 지평일 뿐 그리하여 어두운 처마 밑 기어드는 남루한 기폭일 뿐


  바람이여
  새벽 이슬잠 포근한 아가의 고운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정한 것으로 하여 깨어나고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드는 그런 있음으로만 너를 있게 하라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으며 일어나는 그런 바람 속에서만 너는 있어라

 

 

 

(『카오스의 사족』. 범조사. 1958 :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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