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모음 시♠비교 시♠같은 제목 시

산 시 모음 -유승도/김광림/정희성/남유경/함민복/조동례고영조/이자규/도종환 등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2. 2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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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도

 

 

나는 둥그런 산에 산다

나무와 밭으로 뒤덮인 산,

숲에서 나온 물줄기는 밭을 가로질러 산 아래 들판으로 흐른다

가끔은 구름이 내 오두막을 감싸기도 한다


내 산엔 산 같은 무덤들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도 산에 묻혔다

아버진 말이 없는 분이셨다

얼굴을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닌 노래를 잘 부르셨다고 한다


이제 출산 날이 다가온 아내의 배를 보니

무덤을 참 많이도 닮았다

 

 


―시집『작은 침묵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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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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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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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정

 

 

들어서는 순간 모습은 사라집니다. 눈보라 속으로 깊어지는

길이 있을 뿐 나는 당신에게 깊숙이 발을 묻습니다.


흰눈 소복한 길, 잔가지들은 목화송이를 답니다. 산 모롱이를

돌아가는 날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보입니다.


당신의 가슴은 너무 깊어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무수한 길은 나를 망설이게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길이 당신에게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인가요?

 

 

 

―시집『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문학의전당,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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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8』(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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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례

 

 

당신을 안기엔 내가 너무 작아

당신에게 안기려 내가 다가갑니다

오르고 오르면

당신 품이려니 생각했는데

다가갈수록

바라보던 당신은 보이지 않고

낯선 잡목만 무성합니다

 

당신 품에 있어도 당신 볼 수 없으니

더 오를 무엇도 없어

바라보던 곳으로 돌아서는데

오르던 길은 우거져 보이지 않고

내 안의 그리움만 산이 되었습니다

무장무장 커가는 산이 되었습니다

 

 

 

―시집『어처구니 사랑』(애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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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고영조

 


  아직도 이 땅에 이름없는 산이 있다 지도에도 없다 이름이 없으니 얼마나 좋으랴 내 고향귀현리에도 이름 없는 봉오리가 있다 마을 뒤에 있다고 뒷동산이고 동구 앞에 있다고 앞산이다 그것도 이름이다 이름 없이 그냥 산이고 나무고 사람이면 어떠리 이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 아니다 하나도 모자라 호도 있고 자도 있고 아명도 있고 필명도 있다 이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은 비석에 이름과 호와 자를 음각으로 깊이깊이 파서 남긴다 이름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많다 나는 이 이름 없는 산이 더 좋다 산이 이름 없으니 산이다 그래서 이름 없는 사람들만이 산에 즐겨온다 이름이 없으면 그것만으로 기쁘다 "우리가 어떻게 하늘과 어머니인 대지와 공기와 시냇물을 팔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장감명 받은 이 말도 실은 이름 없는 인디언 추장이 한 말이다 이름이 없으니 땅과 하늘을 편견 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건청 외 지음, 한국시인협회 엮음『장수하늘소는 그 산에 산다』(굿글로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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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규

 

 

누가 먼저였을까 열려진 문과 찾아간 이름의 관계

우린 그렇게 만났다

 

내 눈으로 비친 언어와 당신 귀에 들리는 풍경의 침전

가지 꺾인 폭설과 뿌리 뽑히는 태풍의 커가는 사랑이란

 

어느날 비를 몰아내고 별과 함께 오는 밤의 낭독

우연처럼 오는게 아니라는 짐승들의 몸짓 따라

 

전 생애를 푸르고 푸르게 흔들어 깊어졌을 때쯤이면 나는

당신 품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시선집『대구의詩 · 2010 연간작품집』(대구시인협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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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동

 

 

명산 아닌

그 산이

두어 점 구름 아래

조용히 누웠는 이름 없는 그 산이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햇살이 부서져

황금빛으로 물든

오솔길에는

빨갛게 익은 열구밥이

정물화같이

푸른 대기 가운데 고정되었다

 

바람과 짐승과 안개가

산 저편으로 잦아든 뒤

해 기울고

소달구지 하나 지나지 않는

신작로길이

영원처럼 멀었다

 

바다 우짖음 소리도

강물의 고요한 숨결도

알지 못하나

소박한 자태로 하여

쓸쓸한 기쁨 안겨주던 산

어린 나를 키워준 산이

탕아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시여

너의 고뇌와 눈물의 아름다움

그리워하지 않은 때 없으나

이룬 것 없이

죄만 쌓여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고향 하늘

   

, 철없이 나선

유랑길

몸은 병들어 초라하기 짝이 없으나

받아주리라 용서해주리라 너만은

이름 없는 나의 산.

 

 

 

시집느릅나무에게(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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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며

 

도종환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시집『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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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산

 

곽효환

 

 

여름에 지친 초록들이

서늘한 바람을 부르는

텅 빈 산

 

뱀 한 마리

맑은 계곡물을 거슬러 오른다

삼각의 머리를 반쯤 물 밖에 내어놓고

온몸을 좌우로 구부려 흔들며

역행하는 힘찬 유선의 유영

어디로 가시는가

 

물안개 그득한 호수

반쯤 몸을 담근 왕버드나무가

듬성듬성 거리를 두고 이룬

나무들의 섬, 섬들

누구를 기다리는가

 

빈 하늘에 뭉게구름

잔영이 되어 고인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숨은 그리움

비어 있는가 혹은 늦지 않았는가

 

바위채송화 솔나리 굴참나무 굴피나무 망개나무

아직 아름다운데

 

 

 

―시집 『지도에 없는 집』 (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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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산

 

김지하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어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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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다


손세실리아


 

산을 내려오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늙은 나무의 흰 뼈와
바람에 쪼여 깡치만 남은 샛길이
세상으로 난 출구를 닫아걸고 있습니다
아직은 사위가 침침하지만
곧 사방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들겠지요
그렇다고 산에 갇힐까 염려는 마세요
설마 그러기야 할라구요
또 그런들 어쩌겠어요


혹시 보이시는지
점자를 더듬는 소경처럼
빛이 아물어야만 판독 가능한
저 내밀한 것들의 아우성 말입니다
밤하늘을 저공 비행하는
반딧불이의 뜨거운 몸통과
흐르지 못하고 서성이는 시린 산그늘,
팥배나무 잎맥에 파인 바람의 지문과
억겁을 휘돌아 식물의 육신을 빌려
짓무른 환부를 째고 해산한
꽃잎 끈 눈물 같은 사리 한알


내 안의 오래된 상처도
푸르고 곱게 부식되어
다음 생엔 부디
이마 말간 꽃으로 환생하시기를
삼가 합장 또 합장하며
저문 산에 꽃燈 하나 내걸고 내려옵니다

 


 

―시집『기차를 놓치다』(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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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산에 올라보면 
 
황진성

 


큰 산에 높이 올라 보면 안다

나무는 모두 계곡을 굽어보고 있다는 것을

깊은 계곡일수록 나뭇잎을 켜켜이 담아두고

그 은밀한 장소를 살짝 열어둔다

이두박근을 실룩이며 드나드는 다람쥐 품어주고

오소리도 호기심에 눈을 껌뻑이며 다녀가고

밤이면 퇴근한 늑대도 찾아올지 모른다

계곡의 음부는 사시사철 열려 있어

나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무들은 불구를 다스려온 궁궐 속 내시같이

이른 새벽 모두 깨어 한 곳을 바라본다

새들이 산의 공기를 팽팽하게 쥐었다 편다

뾰족한 부리로 공기방울을 콕콕 뚫어 놓는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잎사귀가 눈을 반짝이면

또로록 눈알로 떨어져 내리는 아침

부지런한 다람쥐가 두리번거리고 나오며 합장을 하다

등에 떨어진 찬 이슬방울에 깜짝 놀라 냅다 줄행랑친다

봄이 오는 이른 아침 산,

가만히 귀 기울이면 땅을 뚫는 풀씨의 가냘픈 신음소리

흙들이 서로 몸을 밀치고 움찔거리며 숭숭 창을 내는 소리

나뭇잎이 쉬하며 손가락을 입에 대는 동안

햇살은 가만히 계곡을 훑어 주며 천천히 빠져 나간다

 
 

 

―반년간『시에티카』(2010.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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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나오며

 

권정우

 

 

산처럼

자기자리에 서서

남들을 위로해 줄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서 있어야 그럴 수 있을까

 

위로받지않아도

산처럼

항상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얼마나 위로 받아야 그럴 수 있을까

 

어디 있어도

있는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산처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해도

누구도 탓하지 않을

산처럼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9.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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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시내

 

한하운

 

 

산 두메

하 좁아

 

앞 뒤 산을

빨랫줄 치네

 

울 아범

뭐 보고

 

이 산골에

사나

 

나이 찬 가시내는

뻐꾹새 울면

 

머리채 칠렁이어

숨만 가쁘네

 

 


―시집『가도 가도 황톳길』(지문사. 1984.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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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 산이 더 높아 보인다

 

이성부

 

 

산봉우리에 올라가 바라볼 때마다

저 건너편 산봉우리가 더 높아 보인다

건너편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아까 올랐던 산봉우리 되돌아보면

이게 뭔가 그 봉우리가 역시 더 크고 높게 보인다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는 뜻과는 다르지만

아무래도 내가 갈수록 더 낮아져서

자꾸 건너편이 높게 보이는가 보다

산에 다니면서부터 나는 나의 시가

낮은 목소리로 가라앉아 숨을 죽이거나

느리게 걸어가서도 결국은

쓸모없이 모두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키가 큰 욕망은 마침내 무너지고 널브러져서

부스러기가 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쳤다

기를 쓰고 올라와서 본들

건너편 산이 항상 더 높이 보인다

이게 편안하다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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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본 산

 

이성부

  

 

내 책장에 꽃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꽃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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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든다는 것은

 

이태관

 

 

물의 온기로

차의 향내를 풀어내는 일처럼

산에 드는 것은

마음의 어혈을 풀어내는 일이다

산 꿩 울음소리가

우듬지 사이로 길을 내고 있다

 

산의 탯줄은 질기기도 하여

길은 무덤까지 이어져 있다

 

물소리 끊기어

더욱 낮아지는 하늘

산에 드는 것은

온몸을 비우는 일이다

산수유 꽃 진 자리

진달래  피고

그 꽃 위로 산벚꽃 온몸으로 흩날리는

 

산에 드는 것은

하늘과  더욱

가까워지는 일이다

 

 

 

―시집『사이에서 서성이다』(문학의전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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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식사

  

이홍섭

  

 

산 아래에서

산과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

낯설고 험한 산길도

누룽지처럼 익어간다

 

절 밥을 축내던 시절

나는 밥때가 되면

죽어라고 산을 내려와 산을 마주하며 밥을 먹었다

 

찬물에 밥 말아 먹을지언정

밥은 꼭 세간에서 먹어야 한다고

 

이 비루먹을 세간에서

 

 


―시집『터미널』(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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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보며

 

이해인

 

 
늘 그렇게
고요하고 든든한
푸른 힘으로 나를 지켜 주십시오


기쁠 때나 슬플 때
나의 삶이 메마르고
참을성이 부족할 때
오해받은 일이 억울하여
누구를 용서할 수 없을 때


나는 창을 열고
당신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름만 불러도 희망이 생기고
바라만 보아도 위로가 되는 산
그 푸른 침묵 속에
기도로 열리는 오늘입니다


다시 사랑할 힘을 주십시오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6』(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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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크는 산

 

이해인

 


좋아하면 할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엄마
한번 불러 보고
하느님
한번 불러 보고
친구의 이름도 더러 부르면서
산에 오르는 날이
많아질수록
나는 조금씩
산을 닮아가는 것일까?


하늘과 바다를 가까이 두고
산처럼 높이
솟아오르고 싶은 걸 보면


산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그냥 마음이 넉넉하고
늘 기쁜 걸 보면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6』(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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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산


임동윤

 


내 마음의 산 하나 있다
다가서면 멀리 달아나는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산


그 산으로 달려가면
내 속엔 늘 새로움이 하나
또 다른 마음이 하나
그 속의 크고 높다란 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숲과 계곡


그 속에서 나는 흔들렸다
흔들리면서 바람이 되었다
눈먼 별이 되어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면서 허공을 달려갔다


다가설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산, 강물 같은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내 마음 속의 산 하나 있다 

 

 


―월간『우리詩』(20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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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2

 

이성부

 

 

설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산을 찾아 들어간다

 

그 산에

너르고 착한 다른 세상이 있구나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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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벽*


이성부

 


내 젊은 방황들 추슬러 시를 만들던
 때와는 달리
 키를 낮추고 옷자락 숨겨
스스로 외로움을 만든다
내 그림자 도려내어 인수봉 기슭에 주고
내 발자국 소리 따로 모아 먼 데 바위 뿌리로 심으려니
사람이 그리워지면
눈부신 슬픔 이마로 번뜩여서
그대 부르리라
오직 그대 한몸을 손짓하리라     

  

*숨은 벽 서울 삼각산에 있는 바위산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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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벽 2

 

 

저를 가두는 것이 풀려나는 일
숨는 것이 오히려 드러나는 일
나 여기 있어 온종일 외로워도
나 여기 눈 부릅떠 지켜보누나
찾아드는 발길 드물어 고요하고
내 몸 부대끼는 무리들 없어
내 아직 싱싱하구나 

어느 해 장마철 부슬비 오던 날
그대 혼자 나에게 이르러서
앗차 미끄러지는 모습 보았지 
투덜투덜 한숨 돌리고 
기어이 다시 오르는 꼴 보았지 
나를 타고 넘어 혼자 걸어가던 그대
내 뿌리 스스로 뽑아들고
그대 따라가 그대 방에 갇혀서야
비로소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나를 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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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벽 3

 

 

그대 거기 
붙박혀 움츠려 있음은
오가는 흰구름 따라 눈길 보내거나
매서운 칼바람에 옷깃 여미거나
꽃 피고 지고 새 울어서
단풍 물들어서
흐르는 시간으로
그냥 흘러가는 것들 내버려두는 뜻은 아니다


그대 거기
그냥 주저앉아 있음 아니다
타박타박 그대 외로움 세상을 밟고 간다

 

 


―시집『야간산행』(창장과비평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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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


이성부

 


내 몸의 무거움을 비로소 알게 하는 길입니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느리게 올라오라고
산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리 고되고 숨 가뿐 것 피해 갈 수는 없으므로
이것들을 다독거려 보듬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나무둥치를 붙잡고 잠시 멈추어 섭니다
내가 올라왔던 길 되돌아보니
눈부시게 아름다워 나는 그만 어지럽습니다
이 고비를 넘기면 산길은 마침내 드러누워
나를 감싸 안을 것이니 내가 지금 길에 얽메이지 않고
길을 거느리거나 다스려서 올라가야 합니다
곧추선 길을 마음으로 눌러앉혀 어루만지듯이
고달팠던 나날들 오랜 세월 지나고 나면 모두 아름다워
그리움으로 간절하듯이
천천히 느리게 가비얍게
자주 멈춰 서서 숨 고른 다음 올라갑니다
내가 살아왔던 길 그때마다 환히 내려다보여
나의 무거움도 조금씩 덜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편안합니다

 

 

 

―시집『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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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문답(山中問答)

 

민병찬 
 


올랐다 내려올 산
기 쓰고 왜 오르냐


살다가 죽을 목숨
왜 사냐고 되물으니


엿듣던 양지꽃 하나
노오랗게 웃고 있네.

  

 


―민병찬 제3시조집『신백자리의 푸른 일기』(고요아침, 2011. 6)
―격월간『유심』(2011. 9-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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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박노식



백지 한 장 머리맡에 누이고
시를 얻어 잠이 들었다

꿈결에 여러 번 손이 가고 뒤척였다

늦은 아침 마당에 나와 먼 산을 둘러보다 울컥하여 다시 방에 들었다

죽은 말을 솎고 또 몇은 비틀어서 여기저기 걸어놓았다

검은 종이를 들어 터니
깨알 같은 글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어제의 시가
방금 둘러본 겨울 산같이 휑하고 가벼워져서
나의 얼굴마저 갸름해졌다




―계간『시와소금』(2017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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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에 이력서를 내다

 

최정란

 

 

잎 지으랴 꽃 빚으랴 바쁜 나무

봄이 주문한 꽃들의 견적서를 쓰고

잎들의 월간 생산 계획을 짠다

가장 알맞은 순서도에 따라

발주 받은 꽃들을 완성한다

납기에 늦지 않게 꽃들을 싣고

좁은 가지 끝까지 빠짐없이 배달하려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안으로 굳은 옹이를 쓰다듬는 나무

연말 결산은 붉은 낙엽으로 다 턴다

대차대조표에 빈 가지만 남아도

봄이면 다시 꼼꼼하게 부름켜를 조인다

제 몸의 스위치를 올려

가지와 뿌리를 닦고 기름친다

나도 나무공장에 출근하고 싶다

숙련공 아니어서 정식으로 채용이 안 된다면

꽃 지고 난 뒷설거지라도

나무를 거들고 싶다

첫 월급봉투처럼 두근거리며

봄인 나무와 딱 한 번, 접 붙고 싶다

 

    

 

시집여우장갑(문학의전당,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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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가는 곳


박판석 

 

 

사람들은 오르고 산은 내려온다

물과 나무와 바위와 짐승이 사이좋게 내려오는

저 아래편 골짜기

사람들은 산이 하늘로 치솟는다고 말하지만

산을 따라 내려가 보면

제 몸을 헐어 골짜기로 모이는 숲과 물길

낮은 곳을 향해 흙으로 돌아가는

산의 숨소리가 들린다

산보다 높이 나는 새들도

능선 아래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른다

낮은 곳은 살아있는 것들이 잔뿌리를 내리는 곳

가장 낮은 곳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말한

어느 老 철학자의 말처럼

바람 없는 날이면 산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맑은 연못에 잠시

제 모습을 내려놓는다





―시집도토리 열매 속에는 큰 산 하나 들어가 산다』(시와사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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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시집『게 눈 속의 연꽃』(문학과지성사, 1990)



산에가는이유,의역사

 

박의상(1943)

 

 

산에 갔지

처음엔 꽃을 보러 갔지

새와 나무를 보러 갔지

다음엔 바위를 보러 갔고

언제부턴가 무덤을 보러 갔지

 

그리고 오늘부터는

저것들 보자고 산에 가지

산 아래 멀리 저어기

강가의 새 도시에

우뚝 선 것들,

번쩍이고 으르렁대는

세상에, 저 예쁜 것들,

야호! 야호!

그래, 어디, 어디,

, 다시 보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5(20150615)



홰치는 산

 

문인수

 

 

방올음산 북벽으로 서 있다


그 덩덜미 시퍼렇게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


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갔다.
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 낸 아버지


흰내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
첫 새벽 홰치는 소리 들었다


집 뒤 동구 둑길 위에 아버지 우뚝 서 있고
여명 속에서 그렇게 방올음산 꼭대기 솟아올라
아, 붉새 아래로 천천히 어둠 가라앉을 때
그러니까, 이제 막 커다랗게 날개 접어 내리며
수탉, 마당으로 내려서고


봄, 연두들녘 물안개 벗으며 눕다

  

 

 

-시집『홰치는 산』(천년의 시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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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그림자

 

이순희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간다

 

자신의 비밀과 허물을 뱀처럼 벗어놓고서

다행히 그에겐 모든 걸 숨겨줄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런 그가 깊고 조용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동안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놓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고요한 품을 더듬어 찾듯이

그 응달에 다 풀어내고 싶어졌다​​

 

 

―​시집 꽃보다 잎으로 남아(서정시학,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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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 올라


김형영

 

 

산꼭대기에 올라

소나무 밑에 누워 본다.

얽히고설킨 가지와

가지마다 푸른 솔잎 사이로

바람과 구름 따라

근심 걱정이 씻은 듯 사라진다.

 

하늘을 향해 몇백 년을 자란

늙은 소나무 밑에 누워 있으면

내가 가장 가벼워지는 시간,

어디든 춤추며 날아갈 것 같다.

 

좋은 날 좋은 시 택해서

막걸리 한두 말 퍼다

뿌리 깊이 부어드려야겠다.

 

 

 

시집땅을 여는 꽃들(문학과지성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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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식



내가 처음 감성의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너의 부리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음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어머니 치맛자락으로 출렁이며

어린 시야의 절반을 차지했던 너

돌아서면 아득히 멀어지고

품안에 들어서면 정중한 너그러움에

가슴 설레던 기억들

그곳은 시퍼런 동경의 바다였다


오직 구름과 말할 뿐

바람만이 들을까 태초의 소리를

산이 바다에서 왔음을 안 이후

나는 인생의 절반을 너에게 걸었다




시집『그대 간 자리에 꽃이 피면』(도서출판 그루, 2014)



산 너머 남촌에는


김동환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령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나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데

 

 


(『해당화』. 대동아사 1942:『파인 김동환 시집』. 국학자료원. 1995)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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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저쪽


카알 붓세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아, 남 따라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네.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김희보 엮음『世界의 名詩』(가람기획 증보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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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오르는 산


정일근

 


영축산은 영락없는 독수리 형상이다.
날개 크게 펼쳐 하늘 허공을 돌며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나는 느낀다, 무진장 무진장 눈이라도 퍼붓는 날이면
흰 날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산의 들숨날숨 따라가다 나도 함께 숨을 멈추고 만다.
명창의 한 호흡과 고수의 북 치는 소리 사이
그 사이의 짧은 침묵 같은, 잠시라도 방심한다면
세상 꽉 붙들고 있는 모든 쇠줄들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지는 것이다.
겨울산을 면벽 삼아 수좌들 동안거에 들고
생각 놓으면 섬광처럼 날아와 눈알 뽑아버릴
독수리 한 마리 제 앞에 날려 놓고
그도 물잔 속의 물처럼 수평으로 앉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잔 속의 물 다 쏟고 마는
그 자리에 내 시를 들이밀고, 이놈 독수리야!
용맹스럽게 두 눈 부릅뜨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들처럼 죽기를 살기처럼 생각한다면
마주하는 산이 언젠가는 문짝처럼 가까워지고
영축산은 또 문짝의 문풍지처럼 얇아지려니
그날이 오면 타는 손가락으로 산을 뻥 찔러보고 싶다.
날아라 독수리야 날아라 독수리야
산에 구멍 하나 내고 입바람을 훅 불어넣고 싶다.
산 뒤에 앉아 계신 이 누구인지 몰라도
냉큼 고수의 북채 뺏어들고
딱! 소리가 나게 산의 정수리 때려
맹금이 날개로 제 몸을 때려서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
마침내 우주로 날아오르는 산을 보고 싶은 것이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문학사상사. 2003)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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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정일근

 

 

첫눈 맞고 있는 겨울산을 보면

흰털 세운 한 마리 산짐승 같으니

부드럽게 웅크린 등줄기나

가슴께로 바짝 당겨놓은 살진 허벅지

이놈아, 하고 툭툭 치면

웅크렸던 몸 긴 기지개 한 번 펴고는

산길 따라 세차게 달려갈 것 같으니

이 땅 어느 산을 올라도

모든 길은 백두에 닿는다는

백두대간의 큰 꿈을 아는가

첫눈 내리는 날 한반도 모든 산줄기를

흰털 하얗게 곧추세워

하얀 능선 위를 달려가고 있으니

그놈의 등에 덥석 올라타는 꿈이여

겨울산과 한 몸의 날렵한 산짐승이 되어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튼튼한 등뼈를 밟고

한걸음에 달려가는 즐거운 꿈이여


 

 

―시선집『소월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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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


김수열

 

겨울산을 오른다는 건 나무가 되는 것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린 나무가

그런 나무와 마주 서 있는 동안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나무가 되는 것

나무가 되어 나무의 마음을 엿듣는 것

가문 물소리에 대해

돌아오지 않는 새소리에 대해

임자 없는 무덤의 쓸쓸함에 대해

 

겨울산을 내린다는 건 바람이 되는 것

정처 없이 하늘을 떠돌던 바람이

곤한 몸을 지상에 내려놓는 동안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바람이 되는 것

바람이 되어 바람의 마음을 품는 것

서걱서걱 조릿대에 대해

풍화된 노루의 뼈에 대해

눈발을 숨긴 키 작은 구름에 대해

 

겨울산이 된다는 건

늙은 코끼리의 굽은 등이 되는 것




-시집 『생각을 훔치다』(삶이보이는창, 2009)




산은 강이 아니어서

 

김윤현

 


산은 제 혼자 높이 솟아 있어도 외롭지 않고
강은 스스로 한가로이 흘러도 쓸쓸하지 않네
강이 낮게 흘러가면 산은 강이 흘러갈 길 막지 않고
산이 높이 솟아 있으면 강은 산을 비켜 낮게 흘러간다
산은 한 걸음 움직이지 못해도
강이 되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없고
잠시라도 머무르지 못하는 강은
산꼭대기에 이르고 싶은 욕심 또한 없다
산은 오르고 싶을 때 높이 솟아 내려 보지 않고
강은 떠나고 싶을 때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산은 강이 흘러가는 길을 열어 주었고
강은 산을 넘지 않고 돌고 돌아 먼 길을 간다
산이 제 몸 여미고 가슴 열어
숲을 키우고 황조롱이 고라니 보듬어 줄 때
강은 제 몸 길게 뉘고 뉘어
갈겨니 동자개 모래무지 기른다
산이 쉼 없이 강에게 물을 흘려주는 동안
강은 한 방울 물을 스스로 흘러버린 적이 없다
산은 강이 아니어서 산으로 우뚝 서 있어야 하고
강은 산이 아니어서 강으로 유유히 흘러야 하네

 

 


-시인 203인의 특별 공동시집『그냥 놔두라』(도서출판 화남,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