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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박철 - 외상값 갚는 날/김회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7. 11. 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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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 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시집『영진설비 돈 갖다주기(2001,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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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값 갚는

 

김회권

 

 

아내가 쥐어준 에어컨 수리비 오만 원

장터목 샛길로 들자 윷판이 한창이다

 

외람되게 자꾸 쏠리는 눈길

잘하면 공돈에 막걸리가 절로 굴러올 거란 생각

나는 마부에게 돈을 걸고 멍석에 쭈그리고 앉아

내 생애 가장 빛났던 날을 떠올리며

허공 가득 종기윷을 뿌린다

 

길들인 순한 양처럼 다소곳이 모이는 윷들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내리 세 판을 이기자 단박 손에 쥔 뭉칫돈

세상일도 요리 잘 풀리면 오죽 좋으랴

 

순간 뱁새눈으로 날 흘겨보는 상대

이번 막판 덮어쓰기로 끝장내잔다

나는 이 판 이기면 매몰차게 일어서리라

그리하여 오늘을 시발로 몇 날 동안

아름다운 술고래로 즐겨 살리라

 

땀 배인 손 문지르며 허공 가득 윷을 붓자

일제히 뒤를 쫓는 비릿한 눈빛들

그때 윷 하나,

급작 항로를 이탈하나 싶더니

그만 맨땅에 곤두박질이다

 

눈 앞 깜깜히 바서지는 파편

땅이 푸욱 꺼지다

 


 ―시집『우아한 도둑(푸른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