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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문연 -시를 수선하다/어머니의 텃밭/햇빛 손가락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5. 2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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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수선하다

 

곽문연

 

 

탈고 중인 시 한 편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읽는다

낡아서 보풀이 일어나는 옷처럼

시의 행간이 닳고 닳았다

 

옷을 고치는 수선공처럼

치수를 재고 헐렁한 행간을 박음질한다

사족처럼 너덜거리는 실밥을 뗀다

 

각진 모서리가 주머니 밖으로

불쑥 삐져나오고

시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기도 하지만,

 

안경을 썼다 벗으며

밑줄을 그었다 지운다

시어를 고르고 조사를 삭제한다

 

꿰매고 자르고

흠집 많은 생을 짜깁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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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텃밭

 

곽문연

 

 

무씨를 뿌려놓은 텃밭에

무순이 빽빽하게 솟아나오면

어머니는 새순을 솎아 밭고랑으로 던지셨다

 

못된 놈만 뽑혀나가는 거여

빈자리가 많아야 무가 실한 법이여

 

나는 지금껏,

이랑과 이랑을 무사히 건너왔다

어머니는 밭고랑에 엎드려

철없는 나를 튼실하게 키우셨다

 

솎아낸 무는

살아남은 놈의 밑거름인 거여

 

사철 푸른 어머니의 텃밭

단단한 무가

쑥쑥, 회초리처럼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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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손가락

 

곽문연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에 뭉친 통점들이 풀린다

근육이 스르르 부드러워진다

돌아누우세요 사람의 몸이란 참 기특하지요

이 험난한 세상의 어둠을 다 먹어치우니 말이에요

더듬더듬 그녀의 손길이 통증을 짚어낸다

몸속 어둠을 햇빛으로 바꾸어 놓는다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알듯 말듯 미소 짓는 그녀

정작 자신의 통증은 어디에 숨기고 살아갈까

차라리 못 보고 사는 게 행복이죠

뭉친 혈을 풀다보면 내 손길이 어두운 세상을 읽어요

그녀가 부황을 뜬다

캄캄한 몸이 낯선 햇빛을 받아들인다

독한 것일수록 부드럽게 다스려야 해요

아픈 곳을 다독이면 얽힌 고리가 풀리지요

지그시 누르는 햇빛 손가락

내 몸에 켜켜이 쌓인 욕심이 사라진다.

 

 

 

시집단단한 침묵(문학아카데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