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길, 저녁
이문재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고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 놀빛
불려놓은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나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 보는데
실루엣을 단단하게 잠근 그대는 이 땅끝에 와서
어떤 맨처음을 궁리하는가 보다, 참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어려서, 마구 젊기만 해서
이렇게 후욱―― 비린내나는 끝의 비루를
속수한 것들의 무책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것이겠구나
―시집『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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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으로 보내는 편지
박준
오랫동안 기별이 없는 당신을 생각하면 낮고 좁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울음이 먼저 걸어나오더군요
그러고는 바쁜 걸음으로 어느 네거리를 지나 한 시절 제가 좋아한 여선배의 입속에도 머물다가 마른 저수지와 강을 건너 흙빛 선연한 남쪽 땅으로 가더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땅 황토라 하면 알 굵은 육쪽마늘이며 펀지지처럼 잎이 희고 넓은 겨울 배추를 자라게 하는 곳이지요 아리고 맺고 순하고 여린 것들을 불평 하나 없이 안아주는 곳 말입니다
해서 그쯤 가면 사람의 울음이나 사람의 서러움이나 사람의 분노나 사람의 슬픔 같은 것들을 계속 사람의 가슴에 묻어두기가 무안해졌던 것이었는데요
땅 끝, 당신을 처음 만난 그곳으로 제가 자꾸 무엇들을 보내고 싶은 까닭입니다
―시집『당신이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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