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 1
황지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왠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문학과 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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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이동백
오랜만에 어머니 바깥바람 쐬신다
서리 가득 내린 머리숱 고르며
묵정밭 바라보신다
얼레빗처럼 가지런했던 이랑
알고 계실까
시장기 헛돌던 호미질
고스란히 엎드려 있다
오래도록 밭을 안고 있어 따듯하게 굽은 저 소나무
다복한 솔잎 끝에 때늦은 봄눈 이고 있다
눈물이 떨어진다
기억이 나긴 나실까
먼저 산을 넘어가신 아버지가 건네는
흰 손수건 같은 구름 한 장
오래 오래 떠 있다
―격월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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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월간『좋은생각』(200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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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장이지
텔레비전에
떠들썩한 자살사건이 나오면
어김없이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2년인가 3년 만에.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부엌에 가면
냉장고 옆.
울기 좋은 구석에 앉아
냉장고 문을 열면
피안의 빛.
냉동실에 머리를 넣고
북극의 어떤 별에게 수신자부담전화를 해보았습니다.
잘 있다고, 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언가 김치 냄새 같은 것이,
김치 냄새는 아니고,
아무튼 무언가
냄새가 없었습니다.
울다가
운 끝자리에 한참,
앉아 있다가
냉장고 옆에서 발톱을 깎았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계간『창작과비평』(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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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김수우
봄부터 맴돌던 산고양이가 저만치 문간에 서있다고 전화가 왔다
한동안 얼쩡거리던 녀석이 멸치를 얻어먹고 갔다고 후득거린다
입추쯤이던가 북어를 찢다 몇 쪽 나눠졌다며 퐁당퐁당 수선이다
기실 그는 자꾸,
내 안부를 묻는 게다
산고양이도 없는 데 어찌 살아있는가 산고양이처럼 궁금한 게다
굴절된 열정 속에서 살긴 살아있는가, 숨은 쉬는가 캐묻는 게다
며칠 뒤 단풍그늘 아래서 막걸리 한 모금 건넸다며 전화가 왔다
―시집『젯밥과 화분』(신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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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장석남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물리(物理)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
가꾸시는 매화 분(盆)은 피었다 졌겠어요
흉내 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
꽃봉오리가 날로 번져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
행사(行事) 삼아 돌을 하나 옮겼습니다
돌 아래, 그늘 자리의 섭섭함을 보았고
새로 앉은 자리의 청빈한 배부름을 보아두었습니다
책상머리에서는 글자 대신
손바닥을 폅니다
뒤집어보기도 합니다
마디와 마디들이 이제 제법 고문(古文)입니다
이럴 땐 눈도 좀 감았다 떠야 합니다
이만하면 안부는 괜찮습니다 다만
오도카니 앉아 있기 일쑵니다
―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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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곽효환
어느 날,
오래전 당신에게서 안부를 묻는 메일이 왔습니다
광화문 근처를 지나며 문득 생각이 났다지요
아주 가끔씩 생각나는 나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며
아주 가끔 잊지 않고 있다며
수줍게 말꼬리를 흐리더니…
여전히 출근하면 녹차를 마시며 찰떡을 먹고
메일을 읽고 신문을 펼치느냐고
덤덤하게 사소한 안부를 묻는 당신
나는 늘 한 발짝 늦게 깨닫고
하여 서툴게 서두릅니다
몇 번을 썼다 지우고 다시 썼다 지워도
나의 말은 맴돌고
나의 문장은 여전히 상투적이어서
‘아주’와 ‘가끔’ 사이의 경계를 혹은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다시 당신은 소식이 없고
나는 다시 한없는 기다림으로 서성이다
전에 그랬듯이 시들거나 비켜가려나 봅니다
밤새 세찬 비바람 불더니
풍경처럼 가을이 왔습니다
―계간『시평』(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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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김시천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 인지
안부를 물어 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 인지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 인지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 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면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다
―월간『좋은 생각』(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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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정다혜
사랑니 두 개 한꺼번에 뽑았습니다
필요 없는 사랑 여태 갖고 있었냐는 의사의 말에
오래 숨겨놓은 비밀 들킨 것 같아 움찔했지요
사랑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말이 헛돌고
비릿한 슬픔이 이빨에 씹힙니다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는 이런 거구나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아픔 삭여야 하는,
내 안에 당신이라는 큰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던 그런 일 같았지요
이제 치통을 핑계 삼아 엉엉 울고 싶은 날은
없을 것입니다만, 사랑이 빠져버린 자리에
새살 돋는 소리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피가 흐를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거즈를 물고 앙다문 입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마지막 안부를 전합니다
— 그대, 눈물 없이 안녕하시길
―시집『마지막 출근』(문학의전당,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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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정병근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시집『태양의 족보』(세계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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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安否)
윤성택
밤은 파랗고 생각은 굴참나무 밑입니다. 하루가 쓸쓸한 어느 간이역이어서 차를 세우고 풍경이 차창을 내립니다, 설핏 스치면 그새 저녁놀입니다. 어둑해지는 사위 속에서 붉은 신호등만 바라봅니다. 기다리는 시간. 그 짧은 순간이 일생이라면 어떨까요. 기억이 가지는 섬세한 숨소리를 생각합니다. 늘 숨쉬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숨이 턱 막히며 그 기억의 한 가운데 몸을 데려가 놓곤 하지요. 그러니 세월은 여러 가지 기다림을 잇대어 누빈 피륙만 같습니다. 꿈은 삶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꿈으로 환기되기 위해서 마련해 놓은 시간이 아닌지요. 감정의, 격정의 끝점에서 세상은 잠시 멈추고, 저녁해가 느리게 그 호흡을 끌어당깁니다. 이렇게 자판이 나를 앞서 갑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계간『시와사람』(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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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박해림
또 겨울이 왔다
어머니 오래 비워둔 방
햇볕으 잘 드는지
장판 안쪽은 습하지 않은지
부연 유리창 너머 옛길 내다보러 가는데
안부란 참으로 미심쩍은 동물 같아서
못내 마음 서러워지면 오갈 데 없는
승냥이 되어 어깨 처진 채
눈발 헤치고 서러운 입김을 우우 뱉어야 한다
발길 아무렇게나 나뒹굴어도
부연 유리창 너머의 저녁은 여전할 것이므로
여러 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그 길이 그 길 같아서
강가에서 산중에서 헤매기도 하였다
막 햇볕이 사위어져 갈 무렵
어둑한 방문이 가볍게 열렸는데
여기저기 바쁜 발걸음이 채이는 것이
달리아를 닮은 색색의 꽃들이
제 몸 크기만큼의 구들장을
꼭 껴안고 있는 것이었다
다 낡은 꽃벽지가 제 몸에 핀 꽃들을 내어놓고 있었던 거였다
ㅡ계간『다층』(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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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 김초혜(1943∼)
강을 사이에 두고
꽃잎을 띄우네
잘 있으면 된다고
잘 있다고
이때가 꽃이 필 때라고
오늘도 봄은 가고 있다고
무엇이리
말하지 않은 그 말
―일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1』(동아일보, 2015년 05월 19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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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안부
김나영
시들시들한 오줌줄기 같은 연락이 왔다
죙일 집에만 틀니처럼 박혀 계시다는 아버지
하루 한 번 텃밭에 물 뿌리러 갈 때만 외출 하신다는데
요즘 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몇 번 독한 약 뿌렸는데 통 약발이 받질 않는단다
지난 번 통화 땐 열무씨 배추씨
실한 놈으로 사서 부치라고 하셨는데
팔십 평생 한 밭에서 수확한 소출들
씨앗 팡팡 멀리 퍼트리는 힘으로
제 뿌리 죽죽 내리고들 살고 있으니
니들은 네 아버지가 일궈놓은 다모작 아니냐,
울궈 먹어도 몇 번이나 울궈 먹은 게냐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인제 그 뿌리 부실해질 때도 되았지
인제 갈 시간 되았지
내 염려에 무게를 보내 얹는 어머니
기저귀 갈 시간이라고 그만 전화를 끊자신다
링거 선을 타고 전해온 뿌리의 안부에
잊고 있었던 요의가 탱탱하게 쳐들어온다
ㅡ시집『왼손의 쓸모』(천년의시작,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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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에게 안부를 묻다
장순익
보내주신 백계동 녹차를
오늘에야 개봉을 했습니다
막연히 함께 나눌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단풍 들고
낙엽 지고
겨울이 깊어졌습니다
밀어둔 신문 한꺼번에 읽다
손 시린 아침
찻물 끓여 쟁반에 놓고
두 개의 잔을 놓으려다 흠칫했습니다
차 한 잔을 따라
두 손으로 감싸 쥘 때
뜻밖입니다
내가 내 손을 잡아준 지
참 오랜만입니다
덕분에 내게 안부를 묻습니다
녹차 잎이
계절을 모르고
마음 가는 쪽으로 잎 펼쳐갑니다
―시집『빠이빠이 철학자여』(시평사, 2009)
―월간『좋은 생각』(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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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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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어떤 안부
조선의
당신이었군요
가던 나를 붙들고 여름에 서서 가을로 우는,
살길 막막하여 어디 마음 둘 곳 없거든
빛나는 집착 하나만 들고 오래 꿈꿀 수 있는 그곳으로 가자던
가서, 어느 길목부터 빙 둘러 어둠으로 꽁꽁 닫고
쇠사슬 질긴 고독에 묶여 실컷 두들겨 맞자던
그사람
시간이 뭉쳐있는 귀뚜라미 섬!
당신이었군요
밤이면 골목 깊숙이 숨어
외로워야 할만치 짙은 화장을 하고 슬픔을 숨기던
왜 숨었는지
여름 끝에 서보면 안다고 했던가요
가을에 닿기 위해 얼마나 뜨거운 불길 속에서 하루하루를 건너왔는지를
그이 목소리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보면, 안다고 했던가요
뼈째 쏟아내는 울음을 더는 울 수 없어
별이 돋아나는 돌 틈에 끼어 끝내 죽을지라도
눈 감고 세상을 열면
청아한 소리는 남는 법
당신이었군요
기다림의 끝에서 늘 안부를 묻고 싶은,
—시집 『당신, 반칙이야』(시산맥사, 201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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