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 모음

겨울의 뿌리/이성렬(최광임 시인이 읽어주는 디카시 41)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1. 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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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뿌리


이성렬



공중에 머무는 물의 투명한 생장점



그것은 가장 추운 날 어둠 속

대지의 심장을 향한 굳은 심지

밝아오는 빛살에 온몸을 비워내며

공중에 머무는 물의 투명한 생장점




―『최광임 시인이 읽어주는 디카시 41(머니투데이, 20150109)


무엇의 뿌리가 된다는 일은 웅숭깊고도 장엄한 일이다. 저 고드름만 해도 “가장 추운 날 어둠 속”을 뚫고서야 “대지의 심장을 향한 굳은 심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밝아오는 빛살에 온몸을 비워내”는 감내가 있은 후에 비로소 제 가치를 다한다. 저렇듯 공중에 생장점을 두고 겨울을 떠받치는 고드름이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파란만장한 사람의 생애와 다를 바가 없다. 당연히 깃털처럼 자유롭거나 가벼운 것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 경박한 시대는 그 가치를 가시적 현상으로 볼 뿐 존재 이전의 현상이나 의미에는 관심이 없다. 저마다 몸통이 되려 하거나 그 위에 피는 화려한 꽃이 되려 하거나 하다못해 잎이 되기를 열망한다. 묵묵히 몸통을 떠받쳐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뿌리 따위는 의식에조차 두지 않는다. 갈수록 사회가 부박해 지는 이유다. 

일월이다. 지난날 혹, 무성한 잎이나 화려한 꽃만을 꿈꾸어 온 것은 아닐까 돌아봐지는 것인데, 겨울이 겨울답게 한 계절을 지내다 갈 수 있는 것은 저 고드름 뿌리가 받쳐내는 힘 때문인 것처럼 내 삶이 삶다울 수 있도록 묵묵히 자기 몫을 떠받치고 가는 새해이기를 소망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