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 모음

보리밭/최광임 (최광임 시인이 읽어주는 디카시 39)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9. 3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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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최광임

 

 

까마귀 떼 날아가고 날아올 때에도

서릿발을 뚫고 동은 튼다

 

거기, 부단히 잎을 밀어 올리고 키우는

보리세상이 있다

 

 

 

―『최광임 시인이 읽어주는 디카시 39(머니투데이, 20150102)




  김제 벽골제에 가면 보리밭이 만경(萬頃)이다. 이른 아침 지평선에서부터 먼동이 터오면 만경 이랑 이랑이 밤새 내려앉은 서리를 하얗게 뒤집어쓴 채 드러난다. 그 시간만큼은 극성을 부리는 까마귀, 까치, 기러기 떼도 아침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다. 말로만 듣던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지고 역시 잠이 덜 깬 듯 볼그족족한 모습으로 동쪽의 어둠부터 밀쳐내며 날은 밝아온다. 그 아래가 다 보리밭 만경이다. 발바닥에서부터 생의 충동이 꿈틀거리는 시간이다. 저곳의 지금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듯 아름답다.

  그러나 동이 트고 다시 어두워지기 전까지 그곳은 치열한 생존의 터전이다. 농부들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먹거리를 찾아 나선 새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밤이면 혹한의 추위를 견뎌낸 얼지 않은 잎만이 살 수 있다. 이 겨울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고서야 4월의 청보리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꼭 우리네 세상살이와 닮았다. 겉으로는 근사한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하나 저 만경의 보리들처럼 힘들지 않은 생을 살고 있는 이는 존재치 않는다. 해가 바뀐 새해에도 힘껏 살아야할 이유이다.




[최광임 시인이 읽어주는 디카시]-서릿발을 뚫고 동은 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