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
고운기
흙 묻은 자갈이 낮잠 자는 옛길
새로 만든 도시의 사람 드문 골목길
강둑 기슭에는 꽃을 내려놓고 푸르게 움돋는 개나리 잎
뺏길 뻔하다 겨우 살아남은 언덕길
나는 자랑같이 자전거를 타고
머리카락 좀 흩날리면서
돌아오지 않을 강물과 인사도 나누다가
거슬러 거슬러
입에서 터지는 대로
거슬러 거슬러 가슴에 담은 정이
묵은 대나무처럼 솟구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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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
고운기
혼자일 때 먹을거리 치고 비빔밥만한 게 없다
여러 동무들 이다지 다정히도 모였을까
함께 섞여 고추장에 적절히 버물려져
기꺼이 한 사람의 양식이 되러 간다
허기 아닌 외로움을 달래는 비빔밥 한 그릇
적막한 시간의 식사여
나 또한 어느 큰 대접 속 비빔밥 재료인 줄 안다
나를 잡수실 세월이여, 그대도 혼자인가
그대도 내가 반가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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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고운기
1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오고
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산마을로 들어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사립문 밖에 나와 산과 구름이 겹한
새 날아가는 쪽 하늘 바라보다
밀물 드는 모랫벌 우리가 열심히 쌓아 두었던
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
낮의 햇볕 아래 대역사를 벌이던 조무래기들
다 즈이 집들 찾아들어가 매운 솔가지 불을 피우고
밥 짓고 국 나르고 밤이 오면 잠들어야 하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분주히 하루를 정리하고들 있었다
그러면 물은 먼 바다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의 집 앞까지 밀려와 모래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부터 잠재웠다
열심히 쌓던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각자의 집으로 찾아들어간 조무래기들의 무심함이나
물은 사납거나 거세지 않게
천천히 고스란히 잠재우고 있었다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와
산마을 어디로 사라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2
이 도시에서 밀물처럼 몰려오는 어둠
먼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길 버스 종점에 내려
돌아올 버스 토큰 하나 남았던 허전함처럼
모두 쓰고 버리고 힘들여 쌓아놓고 오는 밤
불을 키우고 어둠을 밝혀
한낮의 분주함처럼 서성이지만
먼 옛마을에 찾아와 호롱불 몇 개로 정체를 밝히던 어둠이여
오늘 인공의 빛을 피해 찾아오는 밀물이여
이미 어린아이 적처럼
만들었던 것들과 무심히 결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깊은 잠을 주고 또 평평히
세상의 물상들 내려 앉히는
대지의 호흡이여
어느 땐가 밤이 깊어져
물은 떠나온 제 땅으로 돌아가고
백지처럼 정돈된 모래벌에 아침이 오면
이루었으나 아무것 이룬 것 없는 흔적 위에
조무래기들 다시 모여들었더니
물이 들어왔다 나간 이 도시의 고요함을 딛고
내가 간다
살아왔던 일일랑 잊을 만하고
새 벌판은 끝이 없어
또 쌓아야 모습은 못날 뿐이지만
일이 끝나 날이 저물면
가슴에 벅차도록 몰려오는 밀물은
산이 되고 밭이 되고
집과 자동차와 친구가 되고
정승이 되고 나라가 되고
희망도
사랑도 되었을 것을.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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