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림 시선집 1.....1 2 3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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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선집 1

1
겨울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애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애기가 나옥.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07.12.26. 오후 5시16분



2
시골 큰집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대학을 나온 사촌형은 이 세상이 모두
싫어졌다 한다.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뒤적이다 훌쩍 뛰쳐나가면
나는 안다 형은 또 마작으로
밤을 세우려는 게다. 닭장에는
지난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가.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ㅈ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국화꽃이 피어 싱그럽다 그것은
큰형이 심은 꽃. 새아줌마는
그것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화사한
코스모스라도 심고 싶다지만
남의 땅이 돼버린 논둑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07.12.26. 오후 5시 22분

3
원격지遠隔地

박서방은 구주에서 왔다 김형은 전라도
어느 바닷가에서 자란 사나이.
시월의 햇살은 아직도 등에 따갑구나.
돌이 날고 남포가 터지고 크레인이 운다.
포장 친 목로에 들어가
전표를 주고 막걸리를 마시자.
이제 우리에겐 분노가 있을
뷴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
느티나무 아래 자전거를 세워놓은
면서기패들에게서 세상 애기를 듣고.
아아 이곳은 너무 멀구나, 도시의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
오늘밤엔 주막거리에 나가 섰다를
하자 목이 터지게 유행가라도 부르자.
사이렌이 울면 밥장수 아주머니의
그 살찐 엉덩이를 때리고 우리는
다시 구루마를 밀고 간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밀린 간조날을
꼽아보고. 건조실 앞에서는 개가
짖어댄다 고추 널린 마당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제기를 찬다. 수건으로
볕을 가린 처녀애들은 킬킬대느라
산태기 속의 돌이 무겁지 않고
십장은 고함을 질러대고. 이 멀고
외딴 공사장에서는 가을해도 길다.


07.12.26/ 오후 5시 49분--중간자를 몰라 한문 찾느라 시간이 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