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따라 써보기 -떠도는자의 노래 신경림/이름을 지운다 허형만/희망 나태주/졸부가 되어 김희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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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써 보기 ......... 07.12.23 다시 시작


1
떠도는 자의 노래/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서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서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다시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지 모른다



07.12.23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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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름을 지운다/허영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97.12.23 일요일 아침 등산가기 전에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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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희망/나태주

날이 개이면 시장에 가리라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힘들게 페달을 비비며

될수록 소로길를 찾아서
개울길을 따라서
흐드러진 코스모스 꽃들
새로 피어나는 과꽃을 보면서 가야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려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해야지
기분이 좋아지면 휘파람이라도 불어야지

어느 집 담장 위엔가
넝쿨콩도 열렸네
석류도 바깥세상이 궁금한지
고개 내밀고 얼굴 붉혔네

시장에 가서는
아내가 부탁한 반찬거리를 사리라
생선도 사고 채소도 사 가지고 오리라


07.12.23 아침에 등산 가기 전 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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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졸부가 되어/임희구


시가 잘 써지지 않아
오랫동안 움츠려 지내다가
지난 여름 가을 난데없이
스무 편의 시를 썼다
시 한 편 없던 내게 스무 편은
가당찮게 많은 것이어서
마음이 안정이 안되고 자꾸만
들뜬다 느닷없이 새로 쓴 시를
스무 편이나 갖게 된 나를
봐라,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나는 마치 전사라도 된 듯이
혼자 가만가만 날뛰었다
진짜 졸부의 마음은 잘 모르겠으나
그도 나만큼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리고
대책없이 즐거웠으리라
벌렁 벌렁 벌렁
자꾸만 벌렁거렸으리라


07.12.23 불암사 등산가기 전 아침에 9시 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