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시>공터의 풍경 /오정순(제10회 천강문학상 우수상 )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2:20
728x90

공터의 풍경

 

오정순

 

 

공터에 내리는 비는 구겨진 절기의 줄기가 느릿합니다

버려진 액자가 있고

시는 난한 포기가 비에 젖고 있습니다

일직의 빗줄기가 지나가고 뿌리를 잡고 있는 바위에

푸른 이끼라도 살아 날듯합니다

깨어진 유리에는 깨어진 햇볕 어울리겠지요

반짝, 비가 갠 공복의 허공엔 햇볕이 따뜻합니다

소슬하게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흔들린 난주변에 먹물이 번져 있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선 봄의 등 뒤로 아지랑이 배접이 구불구불하고

몇 년 아니, 몇 십 년 쯤 피어있었을

꽃대가 피곤해 보입니다

붉은 노을이라도 세 들어 있는지

낙관엔 오래 흔들린 악력握力이 흐릿합니다

 

낡은 시선만 가득한 풍경,

떠나 온 벽의 경사가 누워 있습니다

어쩌면 저 풍경의 크기만 한 흰 공터를

벽에 남겨놓았을지도 모르지요

상실의 흔적들이란 저렇게 각이 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공터의 담 벽이 비스듬히 그늘을 만들고 있고

어쩌다 풍경화 한 점 걸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담벽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공터의 배접으로 드러눕는 시간

흔들리는 그늘들은 모두 저녁으로 걸어갑니다

이제, 그 어떤 풍경도 이 액자에 들어갈 수 없다는 듯

캄캄해지고 있습니다

 

 

<2011 천강문학상 시 당선작>

 

20211151923